히브리서 13장 주석 | 히브리서 31강 – 송태근 목사 \”영문 밖으로 나아갑시다\”(본문 – 히브리서 13:12-13) 답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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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31강 – 송태근 목사 \”영문 밖으로 나아갑시다\”(본문 – 히브리서 13:12-13)
본문 – 히브리서 1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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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3장 주석 – 공동서신 – 예사랑 성경 연구회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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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마 주석, 히브리서 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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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31강 - 송태근 목사 \
히브리서 31강 – 송태근 목사 \”영문 밖으로 나아갑시다\”(본문 – 히브리서 1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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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CBS성서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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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8.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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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3장 주석

13장

=====13: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 ‘형제 사랑’은 이웃 사랑을 강조하는 성결 법전과 연

결되는 것으로(레 19:18) 믿음의 공동체 내에서 형제와 자매를 연결하여 연대감을 갖

도록 하는것이다(22,23절; 2:11,12,17; 3:1,12; 10:19).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지속적

으로 지녀야 할 독특한 특징이다(Lane). 저자는 당시의 수신자들 사이에 신앙이 약해

진 자들을 결속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적으로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권면하고

있다(Bruce, Hewitt).

=====13: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 저자는 앞절에서 권면한 ‘형제 사랑’을 더 확대하여

‘손님 대접’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손님 대접’에 관한 권면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

르침을 반영한 것이다(마 25:35).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으로 인해서 복음 전도 여

행과 그 여행을 위한 숙식을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복음 전도 사역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다(행 21:4,7,16,17,

Thuren, Morris, Hewitt). 그러기에 손님 대접에 대한 권면은 초기 그리스도인에게 중

요한 메시지였으며 그들이 지켜야 할 의무였다(딤전 3:2; 딛 1:8; 벧전 4:8,9, Bruce,

Lane).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 본문은 아브라함의 일을

암시한다.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세 사람의 손님을 영접하고 대접

하였을 때 세 손님은 사라에게 이삭의 출생에 대해 예언하였다(창 18:1-21). 본문은

손님을 대접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하는 덕

목임을 시사한다.

=====13:3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

를 생각하라 – 본문에서 저자는 ‘형제 사랑’에서(1절) ‘손님 대접’으로(2절), ‘손님

대접’에서 ‘갇힌 자와 학대받는 자에 대한 대접’으로 확대하고 있다. 당시 ‘갇힌 자

들’은 심한 대우를 받아서 음식이나 의복에 대해 가족이나 친구들의 도음을 받아야만

했다. 만약 가족이나 친구들의 직접적인 도움이 없다면 그들은 감옥에서 굶주려 죽어

야만 했다.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이 갇힌 자들을 도와주면 그들 역시 갇힌 자와 동일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자신이 갇힌 것처럼 생각하여 도와주라고

한다(고전 12:26, Morris, Bruce). 한편 ‘학대받는 자’는 신앙 때문에 악한 대우를 받

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11:36,37, Lane).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신앙 때문에 고난

을 당하는 소외된 자들과 연대감을 가지고 자신의 몸이 학대받는 것처럼 생각하여 그

들과 교제를 나누어야한다(10:32-34; 11:36-38, Filson).

=====13:4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하나님이 심판하시

리라 – ‘모든 사람’의 헬라어 ‘엔 파신'(* )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Morris, Hewitt). (1) 중성으로 이해하면 단순히 성적인 순결 뿐만 아니라 모든

형편 속에서 결혼을 중시하고 귀하게 여겨야 함을 시사한다. (2) 남성으로 이해하면

모든 남자들이 결혼을 귀하게 여겨야 함을 시사한다. 두 가지 해석 중 전자가 더 타당

하다고 그리스도인들이 성적인 범죄를 행하지 아니하는 것은 단순히 남자에게만 해당

되는 문제가 아니며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결혼 생활 속에서 성적인 범죄를 행하지 아

니하고 결혼을 귀하게 여겨야하기 때문이다. 한편 ‘침소’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코이

테'(* )는 성적인 정결(淨潔)과 함께 사용된 용어로 성생활에 대한 완곡

한 표현이다(Morris, Lane). 성적인 범죄를 통해 침소를 더럽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

정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결혼을 욕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하

나님은 이러한 행위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신다(17절). 저자는 성적인 죄를 범하는 자

에 대해 두 부류로 묘사한다.

(1) 음행하는 자들 – 이것은 결혼 외에 다른 방법으로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포함하여 모든 성적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가리킨다.

(2)간음하는 자들 – 이것은 결혼시에 표현한 서원에 불충실하여 이를 어기며 성적

인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가리킨다.이러한 두 부류의 행위는 불법적인 성 행위를 가

리키는 것으로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Bruce, Lane, Hughes).

=====13:5,6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 돈을 사랑치 말라는 것은 그리스도

인들에게 자주 강조된 금지 명령이다. 돈에 대한 탐욕은 타인의 권리를 생각지 아니하

고 오직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게 할 뿐 아니라 마음에 두 주인을 섬기게 하여 결국 하

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범죄하게 만든다(마

6:24; 눅 16:13; 딤전 6:10, Bruce, Thuren). 그 결과 우상 숭배의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저자는 본절에서 현재 주어진 여건과 물질에 대해 만족할 것을 권면한다. 저

자는 현재 주어진 것에 대해 만족해야 할 이유 두 가지를 제시한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 본문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인용문은 없으며 단지 필로

(Philo)가 동일한 인용문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On the Confusion of Tongues, p.

166). 하지만 저자의 인용문과 필로의 인용문이 동일하다고 해서 저자가 필로의 것을

인용했다고(Moffatt, Spicq) 생각할 이유는 없으며 도리어 다른 헬라어 역본에서 인용

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Morris, Lane, Michel, Delitzsch, Riggenbach).

그리스도인들이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현재 주어진 여건에 만족해야 하는 것은 하나

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켜주시고 함께 하시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창 28:15; 신

31:6; 수 1:5; 사 41:17). 모든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지켜주

신다는 사실은 바울과 같이 현재에 주어진 환경에 자족하게 한다(빌 4:11-13)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 본문은 시 118:6의 인용으로 앞서 언급된 인용문과 연결되

어 ‘약속과 응답’의 형태를 취한다(Michel). 하나님께서 돕는 자로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시편 기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돈과

죽음의 위협으로 부터 자유로와지며 담대해질 수 있다(2:14,15, Lane). 한편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는 부정을 유도하는 수사학적 질문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

를 대항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롬 8:31, Hewitt, Morris).

=====13: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 ‘인도하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헤구메논'(* )은 본장에서 본

절을 제외하고 두 번 더 나온다(17,24절). 17절과 24절은 현재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반면에 본절의 ‘톤 해구메논’은 신앙을 지키다가 죽은 지도자들을 가리킨다(Hewitt,

Bruce). ‘톤 헤구메논’이 가리키는 인물에 대해 혹자는 ‘장로’라고 추측하며(Morris)

혹자는 ‘주의 제자’라고 주장하나(2:3, Hewitt) 명확하지 않다. 한편 ‘인도하는 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공동체 내에

서나 선교 사역 때에 설교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행 4:29,31; 8:25; 13:46, 빌

1:14, Michel, Riggenbach) 지도자들이 청중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하여 구원하시

는 종말론적 메시지를 전달하였음을 나타낸다(1:1,2).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구속사

역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던 지도자들을 기억하고 더불어 그들의 신앙을 본받아야

한다.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 ‘종말’의 헬라어 ‘에

크바신'(* )은 매일의 생활에 대한 결과를 나타내며(Hughes, Bruce)

동시에 ‘죽음’에 대한 완곡한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Moffatt, Westcott). 그리

스도인들은 지도자들이 수많은 고난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신앙을 지키다가 심지어 죽

기까지한 것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과거에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에 의지하며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굳게 잡은 사실을 주의하여 살펴보

고 따라야 한다.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 본문에 대한 해석은

두가지이다. (1) 혹자는 본문이 이 세상의 지도자들은 죽고 사라질지라도 그리스도께

서는 변함이 없으심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Bruce, Morris).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예수께서 ‘어제’ 하나님께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5:7),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대제사

장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변호하시며, ‘영원토록’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간구하시고 계

심을 나타낸다. (2) 혹자는 본절이 7절과 9절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

다(Hewitt, Lane). 이 견해에 따르면 본절은 ‘어제’ 과거의 지도자들이 그리스도를 믿

음의 대상으로 삼고 그를 전파하였으며 ‘오늘’ 수신자 공동체가 ‘어제’ 전함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상한 가르침과(9절) 바꾸려고 하는 상태에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진 구속이 ‘영원한’ 것임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의 타당성을 지닌다.

=====13: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 저자는 본문에서 수신자들에게 다른 교훈에 빠

지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식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마신'(*

)은 9:10에서 사용된 ‘먹는 것’과 동일한 단어로 이상한 교훈을 전하는자들은 이

러한 식물을 통한 의식이나 규례에 의해서 온전하여지고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

하였다. 이러한 거짓된 여러 가지 다른 교훈은 엣세네파(Essenes)나 그와 비슷한 종파

와 연관된 혼합주의적인 영지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Bruce, Hughes). 그러나

‘식물’은 육체에 제한된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온전한 것을 이루실 때까지 허락

된 예법에 블과한 것이었다(9:10). 그러기에 식물과 의식을 통해서는 전혀 어떠한 유

익도 가져다 줄 수 없으며 온전히 깨끗게 할 수 없고 단지 외적인 것만을 정결케 할뿐

양심을 정결케 할 수 없다(9:13,14).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유익과 풍성함은

식물과 그에 따른 의식을 지킴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

미암는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효능에 관한 하

나님의 말씀(2:9)과 기도를 통해서(4:16)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은혜에 의해서만 온전하여질 수 있으며 거짓 가르침이 말하는 것처럼 식물이나

그 의식에 의해서 온전해질 수 없으니 그 식물과 그에 따른 규례는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도래할 때까지로 제한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13:10

우리에게 제단이 잇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

서 먹을 권이 없나니 – 혹자는 ‘제단’의 헬라어 ‘뒤시아스테리온'(*

)이 문자적인 희생 제단 자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나(Hewitt) 그것은

‘희생 제사’에 대한 환유(換喩)로(Bruce, Lane)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인 사역에 대해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8:1-5; 9:11-14,24-26; 10:11,12). 이것은 은유적으로 영문 밖

에서 당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암시한다(12절; 12:2, Spicq, Montefiore,

W. Manson, Andriessen). 십자가상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구원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은혜를 유지하는 원천이 된다(Bruce). 그러기에 새 언약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음식이나 그에 따른 급례에 의해서 거룩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희생 제사

에 의해서 거룩해지며(12절; 9:14; 10:10,14) 그 제단은 레위기에 규정된 법을 따르는

제사장들이나 유대인들은 전혀 참여할 수 없으며 맛볼 수 없는 것이었다(6:5, Kuss).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 제사는 구약에서 규정한 제사 규례나 정결 규례보다 훨씬

우월한 것이며 온전케하는 것이다. 한편 혹자는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를 문자적으

로 신약 시대의 성만찬과 연결지어 제단을 성만찬 식탁으로 해석한다(Schroger). 그러

나 이러한 해석은 본절 내에 성만찬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볼 때 타당하지 않다.

=====13: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 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은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

어 갔으며(레 16:14,15) 희생 제물의 시체는 영문 밖에서 불살라 버렸다(레 16:27).

한편 ‘영문 밖에서’라 함은 다음 절에서 언급될 그리스도의 고난의 장소를 암시한다.

구약의 성소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예시하는 제단에서 먹을 권리

를 갖고 있지 못하며 여전히 구약의 제의에 따라 사는 자들은 골고다에서 예수의 죽음

을 통해서 성취된 속죄 사역의 결과인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수 없다(Lane).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으

니라 – 저자는 본절에서 ‘영문 밖에서’ 희생 제물을 불살라 버린 것과(11절) 성문 밖

에서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고난을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예

루살렘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Lane).

(1) 성문 밖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속죄일의 속죄제를 나타내는 것으로(J. Jeremias).

예수의 고난이 대제사장적인 속죄 사역을 성취하기 위한 새로운 조건임을 시사한다

(10:12). (2) 예수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은 거룩한 영역으로부터 배제당

하는 수치를 나타낸다. 그것은 산헤드린에 의해서 예수께서 정죄받으심은 물론 백성들

에 의해 배척(排斥) 당하심과 급기야 처형 당하심을 시사한다. 한편 ‘거룩케하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세'(* )는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는 것’을 의미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에 의해서 드려진 제사가 제시하지 못

했던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로운 방법을 시사하는 것으로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서만 거룩해질 수 있음을 나타낸다.

=====13:13

그런즉 우리는…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 ‘영문 밖’에 대한 견해는 두 가

지이다. (1) 혹자는 그것이 지상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천상적인 영역으로의 이동을 의

미한다고 주장한다(Thompson). (2) 혹자는 그것이 유대교를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ewitt, Morris, Bruce, Hughes, Westcott, Filson).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

자가 타당하다. 유대인들은 ‘영문’을 거룩한 것으로, ‘영문 밖’을 더럽고 부정한 것

으로 이해하였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영문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은(12절)

거룩한 영역에서 제외 되었으며 부정하고 부끄러운 것로 이해되었다(레 13:46; 민

5:2-4; 신 23:11; 눅 6:22). 그러나 전에 거룩하던 영문은 부정하여졌고, 전에 부정하

던 영문 밖은 거룩하여졌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영문에서 쫓겨나 영문 밖에서 고

난을 당하셨기 때문이다(Bruce). 따라서 저자는 아직도 옛 언약과 유대교의 범주인 영

문 안에 머물러 있지 말고 이제 새 언약과 그리스도가 계신 영문 밖으로 나아갈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 능욕을 지고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영문 밖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데 필

요한 조건을 나타낸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능욕을 지는 일’ 즉 유대교를 떠

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동일한 고난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

도께서 당하신 고난 곧 십자가 상의 죽음은 이방인들에게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며 유

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신 21:22,23; 갈 3:13,

Hewitt, Morris). 그fl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기 위해서 그와 동일하게 수치

와 치욕으로 이해된 십자가를 짐으로 그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제

자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는 복음서의 제자도와 동일하다(마

10:37,38; 막 8:34-38).

=====13:14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 본문은 그리스도

인들이 영문 밖에 나아가기 위해서 ‘능욕’을 기꺼이 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

인들이 생활하는 이 세상이나 유대교 안에는 영구한 하늘의 도성은 없으며 단지 일시

적인 도성만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장차 올 도성은 사라질 도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경영하시는 터가 있는 도성(11:10,16) 곧 하늘의 도성이

다. 그들은 하늘에 기록된 천국 시민이기 때문에 오직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고 이 세

상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나그네와 같은 생활을 하

게 된다.

=====13:15,16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맘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 ‘예수로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 아우투'(* )는 문자적으로 ‘그로

말미암아’라는 의미로 두 가지를 의미한다. (1)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찬미의 제사가

옛 언약의 제사장들에 의해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려지

는 것임을 의미한다. (2)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제사는 더 이상 옛 언약의 제사장들

이 드렸던 동물 희생 제사가 아님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의해 온전한 희생

제사가 단번에 드려졌으므로 더 이상 속죄를 위한 동물 희생 제사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리어 그리스도인들이 드려야 할 제사는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찬미하는 제

사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찬미의 제사를 드린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희

생 제사가 하나님께 온전하게 열납되었음을 시사한다(Hewitt). 한편 ‘항상’은 그리스

도인들에 의해 드려지는 찬미의 제사가 지속적이어야 함을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끊

이지 않고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계속적으로

경험할 때 가능하며 하나님의 약속의 불변성을 확신할 때 이루어진다(Lane).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옅매니라 – 본문은 호 14:2(LXX)의 인용으로 ‘찬

미의 제사’에 대한 설명이다. ‘입술의 열매’는 감사제와 감사 찬송시 사용하는 ‘말’에

대한 셈어적인 표현이다(잠 10:31; 12:14; 13:2; 18:20).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시

는 제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고 드러내는 찬양으로서(LXX 시 49:23) 그것은 하나

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와 선함에 대한 응답이며 하나님과의 계약을 진실하게 이행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이다(Lane, Morris, Bruce).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 저자는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이

‘찬미의 제사’뿐 아니라 사랑의 행위도 하나님께 드려야 함을 역설한다. ‘선을 행함’

의 헬라어 ‘유포이이아스'(* )는 타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모든 친

절한 행위를 가리키며, ‘서로 나눠 주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스'(*

)는 돈이나 물건은 물론 타인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나

누는 관용(寬容)을 가리킨다(Morris, Lane, J.Y.Campbell). 타인을 사랑하는 실제적인

행위가 없는 찬미의 제사는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사랑의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Thuren).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행위를

동반한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이유이다. 친절과 관용 그리고 찬미의 제사는 하나님께

서 새 언약하에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요구하시는 예배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들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말’로는 물론 ‘행함’으로 제사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이러한 제사를 통해서 성취되며, 하나님은 이러한 제사를 기쁜

마음로 열납하신다(Lane).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 본절의 ‘인도하는 자’는 7절의

‘죽은 지도자’와는 달리 현재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인도하는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저자가 반복적으로 지도자들에 대해 복종할 것을 강조하는 것은(7,24절) 당시 배교의

위험과 이해 관계에 직면하여 지도자들을 잘 따르지 아니하고 대적하는 경향이 있었음

을 암시하는 듯하다(2:1-4; 3:7-12; 5:11-6:12; 10:23-29; 12:12-17,25-29, Hewitt,

Lane, Riggenbach).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 본

문은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존경을 받고 복종함을 받는 근거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도자들에게 부여하신 목회적 권위와 책임감이다. ‘경성하기를’의 헬라어

‘아그뤼프누신'(* )은 양떼들을 돌보기 위해 밤을 지새우는

목자상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단어로 신약성경에서 주로 종말론적인 ‘깨어 있음’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막 13:33; 눅 21:36; 엡 6:18, Spicq, Bruce, Morris). 지도자

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영혼 즉 그들의 영적 생활과 복리를 위해서(10:39, Morris,

Bruce, Michel) 날마다 깨어 있어 돌보는 자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리스도인 공동

체의 존경과 순종을 받을 만한 권위가 있다. 한편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는 지

도자들의 책임을 나타낸다. 참된 지도자들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책임 이행에 대한 답

을 요구하실 때 응답해야만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어서 거짓 교사들과 같이 이상한 다

른 가르침을 전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파하며 그리스도인을 돌보고

양육한다.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히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지도자들을 섬기고 순종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것은 지도자들이 양떼들을 돌보

기 위해서 경성(警醒)하는 것이 즐거움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의

불순종과 고집으로 인해서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이행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근

심스러운 일이 된다면 그 지도자의 인도함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전혀 유익이 되

지 못할 것이다(Bruce, Hewitt, Morris).

=====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 1인칭 복수인 ‘우리’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우리’가 순수한 복수로 저자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

다(Westcott, Kent). (2) 혹자는 ‘우리’가 서간체 복수로 저자 자신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ewitt, Bruce).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Morris). 왜냐하면

다음 절에서 1인칭 단수인 ‘내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도자로서 자신을 위

하여 기도해 줄 것을 수신자들에게 부탁하고 있다.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

니 – 개역성경에는 ‘가르'(* ,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본문 즉

저자가 가지고 있는 ‘선한 양심’이 수신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할 수 있는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 ‘더럽혀진 양심’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되므로 하나

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져야 한다(9:14). 저자가 본절에서 자신

의 ‘선한 양심’에 대해 확신하는 것은 자신을 향한 타인의 비방에 대한 방어책으로

(Morris, Lane, Hewitt) 저자 자신이 지도자로서 선한 행동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의무를 잘 수행하였음을 시사한다(Bruce).

=====13:19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 – 저자는

본절에서 수신자들이 속한 공동체에 다시 방문할 수 있도록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한다.

재방문을 위한 기도 요청은 저자와 수신자들간에 개인적으로 상당한 친분 관계가 있었

으며(Hewitt, Lane) 또한 저자가 수신자 공동체를 방문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있었

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방문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저자의 투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Hewitt, Morris, Bruce). 왜냐하면 23절에서 디모데가 감옥에서 나오면 함께 방문할

것이라고 함으로써 자신이 감옥에 투옥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저자가 수신자 공동체에 방문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확실히 있으나 무엇인지는 분명

하지 않다.

=====13:20,21

본문은 송영이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 본문은 사 63:11의 ‘백성과 양 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를 인용한 것이다. 이사야 본문은 모

세에 대한 진술이다. 저자는 모세에 대한 진술인 이사야 본문을 인용하여 미디안의 목

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 부터 이끌어 낸 모세를 유형론적으로 해석하여 ‘양

의 큰 목자’이신 예수께 적용하고 있다(Lane, Bruce). ‘큰’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메간'(* )은 본서에서 예수의 우월성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으며

(4:14; 10:21) 모세와 예수의 비교 또한 새 언약의 중재자인 예수의 우월성을 드러내

는 저자의 독특한 논증 방법이었다(1:1-4; 2:1-4; 3:1-6; 8:1-6; 10:26-31;

12:18-29). 저자는 예수께 ‘큰 목자’라는 칭호를 부여함으로 사 63:11에서 모세에게

칭한 ‘양 무리의 목자’와 대조를 이루게하며 옛 언약의 중재자인 모세보다 새 언약의

중재자인 예수께서 더 위대하심을 강조하고 있다.

영원한 언약의 피로 – 본문은 슥 9:11(LXX)의 영향을 받았다. ‘언약의 피’는 그리

스도의 죽음이 언약의 희생 제사임을 시사하며(9:20; 출 24:8) ‘영원한’은 예수의 속

죄 사역이 영원한 효력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1:8; 5:6,9; 6:20; 9:12,14,15;

10:12,14). 예수의 사역과 희생은 영원한 언약을 이루는 근거가 되었으며 이러한 영원

한 언약은 새 언약과 동일한것으로 옛 언약올 대신하였다. 본문은 다음에 언급될 예

수의 부활과 연결된 것으로, 예수의 부활은 예수께서 자신의 희생으로 이루신 영원한

언약을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셨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통해서 영원히 살아계심

을 나타낸다(9:20, Morris, Hewitt, Lane).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 본문은 본서 내에서 부활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유일한 구절이다. 예수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정하고 비준(批准)하신 하나

님의 직접적인 간섭을 통해서 이루어졌다(Michel, Cranfield, Thuren). 한편 ‘이끌어

내신’의 헬라어 ‘아나가곤'(* )은 두 언약 즉 옛 언약과 새 언약하

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나타낸다.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신 하나님의 간섭은(출 6:7; 20:1,2; 레 19:36; 25:38; 26:13; 신 5:6; 사

63:11-14) 죽은자로부터 예수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행위를 예표한다(Lane). 예수를 죽

은 자 가운데서 이끝어 내심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새로운 언약 즉 영원한 언약

을 맺으시는 근거가 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근거가 된다(21절, Cranfield,

Thuren).

평강의 하나님이 – 이 칭호는 구약성경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

도인들이 만든 하나님의 칭호라고 볼 수 있으며(Lane) 하나님께서 평화의 근원이시며

수여자이심을 시사한다. 또한 이것은 수신자 공동체 가운데 배교의 위험과 지도자와의

불협화음이 있었음을 암시한다(Bruce, Morris, Hewitt). 그래서 저자는 송영에서 수신

자 공동체에게 하나님께서 ‘평화의 하나님’이심을 상기시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서로간의 불화를 억제하고 지도자에게 순복하여 평안을 이룰 것을 강조한다(17

절, Spicq, Thuren, Morris, Bruce).

모든 선한 일에 너희들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 ‘모든 선한 일에’

의 헬라어 ‘엔 판티아가도'(* )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

이다. (1) 혹자는 ‘윤리적인 선한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 선한 윤리적인

행위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Spicq). (2) 혹자는 선한 일을 하

나님 자신에 의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한다(살후 2:17, Michel). (3)

혹자는 선한 일을 ‘하나님의 선한 선물’로 해석한다(마 7:11; 눅 1:53; 갈 6:6; 약

1:17, Lane, Morris).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문

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저자는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수신자 공동체가 필요

로 하는 모든 것을 은혜로 공급하여 주셔서 온전하게 함으로 하나님 자신의 뜻을 행할

수 있도륵 하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

본문은 앞서 언급된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와

상호 보완적이다. ‘즐거운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며(12:28) 하

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도록(15,16절) 부름을 받은 존재임을 시사한다. 이렇

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중재자이시며 새 언약 공동체 내에

서 하나님의 능력을 중재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Lane,

Morris).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륵 있을지어다 아멘 – ‘그에게’에 대해서 혹자는 문법

적으로 ‘하나님’이나 ‘예수’와 모두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둘 다를 가리킬 수 있다고

주장하나(Morris)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Bruce).

왜냐하면 본문의 송영은 죽은 자로부터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

의 응답이기 때문이다(Lane).

=====13:2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

니라 – ‘형제들아’와 ‘용납하라’는 말은 저자가 앞서 기술한 배교나 비그리스도인에

대한 격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진술, 그리고 지도자와 수신자들 사이의 갈등에 대한

훈계와 비교되어 부드럽고 애정이 서려 있다. 본문에서 저자는 이제까지 진술한 내용

을 ‘권면의 말’이라고 정의함으로 자신이 이제까지 진술한 것이 책망보다는 격려차 위

로에 기인한 것이었음을 밝히고 다시 한번 본서의 내용에 주목해 줄 것을 암시하고 있

다. ‘권면의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로구 테스 파라클레세오스'(*

)는 행 13:15에 나오는 표현과 유사한 것으로

‘설교를’ 지칭한다(Bruce, Morris, Lane). 한편 ‘간단히…썼느니라’가 가리키는 부분

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13:18-25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Knox).

(2) 혹자는 13장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R. Anderson). (3) 혹자는 본서 전체를 가

리킨다고 주장한다(Morris, bruce, Hewitt, Lane).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썼느니라’의 헬라어 ‘에페스테일라'(*

)는 ‘편지를 썼다’라는 의미로 본 서신 전체를 가리키며, ‘간단히 썼다’는 것은

유대 문서나 초기 그리스도인 문서에서 공손함을 나타내는 문학적인 표현이기 때문이

다(Hewitt, Lane).

=====13: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 저자가 바울의 동역자였던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부른 것은 디모

데가 수신자들에게 매우 잘 알려져 서로 교제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놓인 것을’

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렐뤼메논'(* )은 완료 시상으

로 이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사역의 임무를 부여받고 보냄을 받은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E.D. Jones). (2) 혹자는 감옥에서 풀려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Hewitt, Lane, Morri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

면 ‘아폴렐뤼메논’이 전자의 견해처럼 사용되었을 경우는 목적어를 동반하나 본절에서

는 목적어를 동반하고 있지 않으며, 더욱이 ‘아폴렐뤼메논’이라는 단어는 흔히 감옥에

서 풀려나는 경우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Brice, Morris). 그러나 디모데가 언제 어디

에 있는 감옥에 갇혔었는지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디모데

가 감옥에서 풀려난 사실을 먼저 알고 전하면서 디모데가 속히 올 경우 함께 방문할

것을 밝히고 있다.

=====13:24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 저자는 본문에서 앞서 언급

한것과 마찬가지로 ‘인도하는 자’와의 문안을 통해서 갈등 관계가 아니라 선한 관계를

형성하여 그들에게 순복(順服)할 것을 암시한다(7,17절). 한편 ‘모든 성도’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혹자는 본서의 수신자들이 속해 있는 도시 전체의 성도

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ane). (2) 혹자는 본서의 수신자들이 모이는 가정 교회의 성

도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uce).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저자

는 수신자들에게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여 화평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화평을 이름

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암시적으로 권면하고 있다.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의 헬라

어 ‘호이 아포테스 이탈리아스'(* )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혹자는 당시 이탈리아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 이탈리아 내

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picq). (2) 혹자는 이탈리아

밖에 있는 사람이 이탈리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하거나 이탈리아가 고향인 자들이

이탈리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uce). ‘호이 아포 테

스 이탈리아스’는 이 두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가 어

렵다(Morris, Bruce, Hewitt).

=====13:25

은혜가 너희 모든 사림에게 있을지어다 –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

)는 비록 흔히 사용되던 인사법이라 할지라도 본서를 마감하는 종결 인

사로서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저자가 본서에서 계속적으로 하나님께서 구속

하시고 인도하시며 도와주시는 은혜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9절; 2:9; 4:16;

12:15). 저자는 마지막 인사로 수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킴으로 배교(背

敎)의 위험에 처해 있는 수신자들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는 물론 지도자와 수신

자들간의 갈등관계를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Lane).

===============================히브리서 주석 끝========================

헬라어 히브리서 13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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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 필라델피아 메네토

개역개정,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새번역,1 서로 사랑하기를 계속하십시오.

우리말성경,1 형제 사랑하기를 지속하십시오.

가톨릭성경,1 형제애를 계속 실천하십시오.

영어NIV,1 Keep on loving each other as brothers.

영어NASB,1 Let love of the brethren continue.

영어MSG,1 Stay on good terms with each other, held together by love.

영어NRSV,1 Let mutual love continue.

헬라어신약Stephanos,1 η φιλαδελφια μενετω

라틴어Vulgate,1 caritas fraternitatis maneat

히브리어Modern,1 אהבת האחים תעמד׃

성 경: [히13:1]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 ‘형제 사랑’은 이웃 사랑을 강조하는 성결 법전과 연결되는 것으로(레 19:18) 믿음의 공동체 내에서 형제와 자매를 연결하여 연대감을 갖도록 하는것이다(22,23절; 2:11,12,17; 3:1,12; 10:19).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지속적으로 지녀야 할 독특한 특징이다(Lane). 저자는 당시의 수신자들 사이에 신앙이 약해진 자들을 결속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적으로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권면하고 있다(Bruce, Hewitt).

테스 필롴세니아스 메 에필란다네스데 디아 타우테스 가르 엘라돈 티네스 크세니산테스 앙겔루스

개역개정,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새번역,2 나그네를 대접하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어떤 이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였습니다.

우리말성경,2 나그네 대접하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천사들을 대접했습니다.

가톨릭성경,2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

영어NIV,2 Do not forget to entertain strangers, for by so doing some people have entertained angels without knowing it.

영어NASB,2 Do not neglect to show hospitality to strangers, for by this some have entertained angels without knowing it.

영어MSG,2 Be ready with a meal or a bed when it’s needed. Why, some have extended hospitality to angels without ever knowing it!

영어NRSV,2 Do not neglect to show hospitality to strangers, for by doing that some have entertained angels without knowing it.

헬라어신약Stephanos,2 της φιλοξενιας μη επιλανθανεσθε δια ταυτης γαρ ελαθον τινες ξενισαντες αγγελους

라틴어Vulgate,2 hospitalitatem nolite oblivisci per hanc enim latuerunt quidam angelis hospitio receptis

히브리어Modern,2 הכנסת ארחים אל תשכחו כי יש אשר הכניסו בה מלאכים ולא ידעו׃

성 경: [히13:2]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 저자는 앞절에서 권면한 ‘형제 사랑’을 더 확대하여 ‘손님 대접’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손님 대접’에 관한 권면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을 반영한 것이다(마 25:35).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으로 인해서 복음 전도 여행과 그 여행을 위한 숙식을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복음 전도 사역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다(행 21:4,7,16,17,Thuren, Morris, Hewitt). 그러기에 손님 대접에 대한 권면은 초기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메시지였으며 그들이 지켜야 할 의무였다(딤전 3:2; 딛 1:8; 벧전 4:8,9, Bruce,Lane).

󰃨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 본문은 아브라함의 일을 암시한다.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세 사람의 손님을 영접하고 대접하였을 때 세 손님은 사라에게 이삭의 출생에 대해 예언하였다(창 18:1-21). 본문은 손님을 대접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하는 덕목임을 시사한다.

밈네스케스데 톤 데스미온 호스 쉰데데메노이 톤 카쿠쿠메논 호스 카이 아우토이 온테스 엔 소마티

개역개정,3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새번역,3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되, 여러분도 함께 갇혀 있는 심정으로 생각하십시오. 여러분도 몸이 있는 사람이니, 학대받는 사람들을 생각해 주십시오.

우리말성경,3 여러분은 자신이 함께 갇혀 있는 것처럼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도 몸을 가진 사람들이니 학대받는 사람들을 기억하십시오.

가톨릭성경,3 감옥에 갇힌 이들을 여러분도 함께 갇힌 것처럼 기억해 주고, 학대받는 이들을 여러분 자신이 몸으로 겪는 것처럼 기억해 주십시오.

영어NIV,3 Remember those in prison as if you were their fellow prisoners, and those who are mistreated as if you yourselves were suffering.

영어NASB,3 Remember the prisoners, as though in prison with them, and those who are ill-treated, since you yourselves also are in the body.

영어MSG,3 Regard prisoners as if you were in prison with them. Look on victims of abuse as if what happened to them had happened to you.

영어NRSV,3 Remember those who are in prison, as though you were in prison with them; those who are being tortured, as though you yourselves were being tortured.

헬라어신약Stephanos,3 μιμνησκεσθε των δεσμιων ως συνδεδεμενοι των κακουχουμενων ως και αυτοι οντες εν σωματι

라틴어Vulgate,3 mementote vinctorum tamquam simul vincti et laborantium tamquam et ipsi in corpore morantes

히브리어Modern,3 זכרו את האסורים כאלו אתם אסורים עמהם ואת הנלחצים באשר גם אתם בבשר׃

성 경: [히13:3]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 본문에서 저자는 ‘형제 사랑’에서(1절) ‘손님 대접’으로(2절), ‘손님 대접’에서 ‘갇힌 자와 학대받는 자에 대한 대접’으로 확대하고 있다. 당시 ‘갇힌 자들’은 심한 대우를 받아서 음식이나 의복에 대해 가족이나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야만했다. 만약 가족이나 친구들의 직접적인 도움이 없다면 그들은 감옥에서 굶주려 죽어야만 했다.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이 갇힌 자들을 도와주면 그들 역시 갇힌 자와 동일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자신이 갇힌 것처럼 생각하여 도와주라고 한다(고전 12:26, Morris, Bruce). 한편 ‘학대받는 자’는 신앙 때문에 악한 대우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11:36,37, Lane).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신앙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소외된 자들과 연대감을 가지고 자신의 몸이 학대받는 것처럼 생각하여 그들과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10:32-34; 11:36-38, Filson).

티미오스 호 가모스 엔 파신 카이 헤 코이테 아미안토스 포르누스 가르 카이 모이쿠스 크리네이 호 데오스

개역개정,4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새번역,4 ㉠모두 혼인을 귀하게 여겨야 하고, 잠자리를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음행하는 자와 간음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 ㉠또는 ‘모두에게 혼인은 귀하니, 잠자리는 더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말성경,4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하게 여기고 잠자리를 더럽히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음란한 사람들과 간음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가톨릭성경,4 혼인은 모든 사람에게서 존중되어야 하고, 부부의 잠자리는 더럽혀지지 말아야 합니다. 불륜을 저지르는 자와 간음하는 자를 하느님께서는 심판하실 것입니다.

영어NIV,4 Marriage should be honored by all, and the marriage bed kept pure, for God will judge the adulterer and all the sexually immoral.

영어NASB,4 Let marriage be held in honor among all, and let the marriage bed be undefiled; for fornicators and adulterers God will judge.

영어MSG,4 Honor marriage, and guard the sacredness of sexual intimacy between wife and husband. God draws a firm line against casual and illicit sex.

영어NRSV,4 Let marriage be held in honor by all, and let the marriage bed be kept undefiled; for God will judge fornicators and adulterers.

헬라어신약Stephanos,4 τιμιος ο γαμος εν πασιν και η κοιτη αμιαντος πορνους δε και μοιχους κρινει ο θεος

라틴어Vulgate,4 honorabile conubium in omnibus et torus inmaculatus fornicatores enim et adulteros iudicabit Deus

히브리어Modern,4 האישות תיקר בכל וערש יצועכם אל יחלל את הזנים ואת המנאפים ידין אלהים׃

성 경: [히13:4]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 ‘모든 사람’의 헬라어 ‘엔 파신'(*)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있다(Morris, Hewitt). (1) 중성으로 이해하면 단순히 성적인 순결 뿐만 아니라 모든 형편 속에서 결혼을 중시하고 귀하게 여겨야 함을 시사한다. (2) 남성으로 이해하면 모든 남자들이 결혼을 귀하게 여겨야 함을 시사한다. 두 가지 해석 중 전자가 더 타당하다고 그리스도인들이 성적인 범죄를 행하지 아니하는 것은 단순히 남자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며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결혼 생활 속에서 성적인 범죄를 행하지 아니하고 결혼을 귀하게 여겨야하기 때문이다. 한편 ‘침소’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코이테'(*)는 성적인 정결(淨潔)과 함께 사용된 용어로 성생활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다(Morris, Lane). 성적인 범죄를 통해 침소를 더럽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결혼을 욕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행위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신다(17절). 저자는 성적인 죄를 범하는 자에 대해 두 부류로 묘사한다.

󰃨 (1) 음행하는 자들 – 이것은 결혼 외에 다른 방법으로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포함하여 모든 성적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가리킨다.

󰃨 (2)간음하는 자들 – 이것은 결혼시에 표현한 서원에 불충실하여 이를 어기며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두 부류의 행위는 불법적인 성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Bruce, Lane, Hughes).

아필라르귀로스 호 트로포스 아르쿠메노이 토이스 파루신 아우토스 가르 에이레켄 우 메 세 아노 욷 우 메 세 엥카탈리포

개역개정,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새번역,5 돈을 사랑함이 없이 살아야 하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 하셨습니다. / ㉡신 31:6; 8; 창 28:15; 수 1:5

우리말성경,5 돈을 사랑하며 살지 말고 지금 갖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주께서는 친히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않겠고 또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31:6

가톨릭성경,5 돈 욕심에 얽매여 살지 말고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그분께서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영어NIV,5 Keep your lives free from the love of money and be content with what you have, because God has said, “Never will I leave you; never will I forsake you.”

영어NASB,5 Let your character be free from the love of money, being content with what you have; for He Himself has said, “I WILL NEVER DESERT YOU, NOR WILL I EVER FORSAKE YOU,”

영어MSG,5 Don’t be obsessed with getting more material things. Be relaxed with what you have. Since God assured us, “I’ll never let you down, never walk off and leave you,”

영어NRSV,5 Keep your lives free from the love of money, and be content with what you have; for he has said, “I will never leave you or forsake you.”

헬라어신약Stephanos,5 αφιλαργυρος ο τροπος αρκουμενοι τοις παρουσιν αυτος γαρ ειρηκεν ου μη σε ανω ουδ ου μη σε εγκαταλιπω

라틴어Vulgate,5 sint mores sine avaritia contenti praesentibus ipse enim dixit non te deseram neque derelinquam

히브리어Modern,5 רחקו מאהבת כסף ושמחו בחלקכם כי הוא אמר לא ארפך ולא אעזבך׃

성 경: [히13:5,6]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 돈을 사랑치 말라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주 강조된 금지 명령이다. 돈에 대한 탐욕은 타인의 권리를 생각지 아니하고 오직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게 할 뿐 아니라 마음에 두 주인을 섬기게 하여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범죄하게 만든다(마6:24; 눅 16:13; 딤전 6:10, Bruce, Thuren). 그 결과 우상 숭배의 결과를 초래하기때문에 저자는 본절에서 현재 주어진 여건과 물질에 대해 만족할 것을 권면한다. 저자는 현재 주어진 것에 대해 만족해야 할 이유 두 가지를 제시한다.

󰃨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 본문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인용문은 없으며 단지 필로(Philo)가 동일한 인용문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On the Confusion of Tongues, p.166). 하지만 저자의 인용문과 필로의 인용문이 동일하다고 해서 저자가 필로의 것을 인용했다고(Moffatt, Spicq) 생각할 이유는 없으며 도리어 다른 헬라어 역본에서 인용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Morris, Lane, Michel, Delitzsch, Riggenbach). 그리스도인들이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현재 주어진 여건에 만족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켜주시고 함께 하시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창 28:15; 신31:6; 수 1:5; 사 41:17). 모든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지켜주신다는 사실은 바울과 같이 현재에 주어진 환경에 자족하게 한다(빌 4:11-13)

󰃨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 본문은 시 118:6의 인용으로 앞서 언급된 인용문과 연결되어 ‘약속과 응답’의 형태를 취한다(Michel). 하나님께서 돕는 자로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시편 기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돈과 죽음의 위협으로 부터 자유로와지며 담대해질 수 있다(2:14,15, Lane). 한편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는 부정을 유도하는 수사학적 질문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를 대항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롬 8:31, Hewitt, Morris).

호스테 다르룬타스 헤마스 레게인 퀴리오스 에모이 보에도스 카이 우 포베데소마이 티 포이에세이 모이 안드로포스

개역개정,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새번역,6 그래서 우리는 담대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다. 누가 감히 내게 손댈 수 있으랴?” / ㉢시 118:6; 7

우리말성경,6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히 말합니다.“주는 나를 돕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나를 어찌하겠는가?” 시118:6-7

가톨릭성경,6 그러므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영어NIV,6 So we say with confidence, “The Lord is my helper; I will not be afraid. What can man do to me?”

영어NASB,6 so that we confidently say, “THE LORD IS MY HELPER, I WILL NOT BE AFRAID. WHAT SHALL MAN DO TO ME?”

영어MSG,6 we can boldly quote, God is there, ready to help; I’m fearless no matter what. Who or what can get to me?

영어NRSV,6 So we can say with confidence, “The Lord is my helper; I will not be afraid. What can anyone do to me?”

헬라어신약Stephanos,6 ωστε θαρρουντας ημας λεγειν κυριος εμοι βοηθος και ου φοβηθησομαι τι ποιησει μοι ανθρωπος

라틴어Vulgate,6 ita ut confidenter dicamus Dominus mihi adiutor non timebo quid faciat mihi homo

히브리어Modern,6 על כן נבטח ונאמר יהוה לי בעזרי לא אירא מה יעשה לי אדם׃

므네모뉴에테 톤 헤구메논 휘몬 호이티네스 엘랄레산 휘민 톤 로곤 투 데우 혼 아나데오룬테스 텐 엨바신 테스 아나스트로페스 미메이스데 텐 피스틴

개역개정,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새번역,7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일러주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죽었는지를 살펴보고, 그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우리말성경,7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해 준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산 삶의 결과를 살펴보고 그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가톨릭성경,7 하느님의 말씀을 일러 준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영어NIV,7 Remember your leaders, who spoke the word of God to you. Consider the outcome of their way of life and imitate their faith.

영어NASB,7 Remember those who led you, who spoke the word of God to you; and considering the result of their conduct, imitate their faith.

영어MSG,7 Appreciate your pastoral leaders who gave you the Word of God. Take a good look at the way they live, and let their faithfulness instruct you, as well as their truthfulness. There should be a consistency that runs through us all.

영어NRSV,7 Remember your leaders, those who spoke the word of God to you; consider the outcome of their way of life, and imitate their faith.

헬라어신약Stephanos,7 μνημονευετε των ηγουμενων υμων οιτινες ελαλησαν υμιν τον λογον του θεου ων αναθεωρουντες την εκβασιν της αναστροφης μιμεισθε την πιστιν

라틴어Vulgate,7 mementote praepositorum vestrorum qui vobis locuti sunt verbum Dei quorum intuentes exitum conversationis imitamini fidem

히브리어Modern,7 זכרו את מנהיגיכם אשר הגידו לכם את דבר האלהים בינו לאחרית דרכם ולכו באמונתם׃

성 경: [히13:7]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 ‘인도하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헤구메논'(*)은 본장에서 본절을 제외하고 두 번 더 나온다(17,24절). 17절과 24절은 현재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반면에 본절의 ‘톤 해구메논’은 신앙을 지키다가 죽은 지도자들을 가리킨다(Hewitt,Bruce). ‘톤 헤구메논’이 가리키는 인물에 대해 혹자는 ‘장로’라고 추측하며(Morris) 혹자는 ‘주의 제자’라고 주장하나(2:3, Hewitt) 명확하지 않다. 한편 ‘인도하는 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공동체 내에서나 선교 사역 때에 설교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행 4:29,31; 8:25; 13:46, 빌1:14, Michel, Riggenbach) 지도자들이 청중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하여 구원하시는 종말론적 메시지를 전달하였음을 나타낸다(1:1,2).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던 지도자들을 기억하고 더불어 그들의 신앙을 본받아야 한다.

󰃨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 ‘종말’의 헬라어 ‘에크바신'(*)은 매일의 생활에 대한 결과를 나타내며(Hughes, Bruce)동시에 ‘죽음’에 대한 완곡한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Moffatt, Westcott). 그리스도인들은 지도자들이 수많은 고난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신앙을 지키다가 심지어 죽기까지 한 것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과거에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에 의지하며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굳게 잡은 사실을 주의하여 살펴보고 따라야 한다.

예수스 크리스토스 에크데스 카이 세메론 호 아우토스 카이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개역개정,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새번역,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한결같은 분이십니다.

우리말성경,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한결같으신 분입니다.

가톨릭성경,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

영어NIV,8 Jesus Christ is the same yesterday and today and forever.

영어NASB,8 Jesus Christ is the same yesterday and today, yes and forever.

영어MSG,8 For Jesus doesn’t change–yesterday, today, tomorrow, he’s always totally himself.

영어NRSV,8 Jesus Christ is the same yesterday and today and forever.

헬라어신약Stephanos,8 ιησους χριστος χθες και σημερον ο αυτος και εις τους αιωνας

라틴어Vulgate,8 Iesus Christus heri et hodie ipse et in saecula

히브리어Modern,8 ישוע המשיח גם תמול גם היום הוא הוא וגם לעולמים׃

성 경: [히13:8]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 본문에 대한 해석은 두가지이다. (1) 혹자는 본문이 이 세상의 지도자들은 죽고 사라질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변함이 없으심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Bruce, Morris).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예수께서 ‘어제’ 하나님께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5:7),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변호하시며, ‘영원토록’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간구하시고 계심을 나타낸다. (2) 혹자는 본절이 7절과 9절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Hewitt, Lane). 이 견해에 따르면 본절은 ‘어제’ 과거의 지도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그를 전파하였으며 ‘오늘’ 수신자 공동체가 ‘어제’ 전함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상한 가르침과(9절) 바꾸려고 하는 상태에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진 구속이 ‘영원한’ 것임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디다카이스 포이킬라이스 카이 크세나이스 메 파라페레스데 칼론 가르 카리티 베바이우스다이 테 카르디안 우 브로마신 엔 호이스 우크 오펠레데산 호이 페리파툰테스

개역개정,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새번역,9 여러 가지 이상한 교훈에 끌려 다니지 마십시오. ㉣음식 규정을 지키는 것으로 마음이 튼튼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튼튼해지는 것이 좋습니다. 음식 규정에 매여서 사는 사람들은 유익을 얻지 못했습니다. / ㉣그, ‘음식으로가 아니라’

우리말성경,9 여러분은 갖가지 이상한 가르침에 끌려 다니지 마십시오. 마음은 음식이 아니라 은혜로 견고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음식에 집착한 사람들은 유익을 얻지 못했습니다.

가톨릭성경,9 갖가지 이상한 가르침에 끌려가지 마십시오. 음식에 관한 규정이 아니라 은총으로 마음을 굳세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규정에 따라 살아간 이들은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영어NIV,9 Do not be carried away by all kinds of strange teachings. It is good for our hearts to be strengthened by grace, not by ceremonial foods, which are of no value to those who eat them.

영어NASB,9 Do not be carried away by varied and strange teachings; for it is good for the heart to be strengthened by grace, not by foods, through which those who were thus occupied were not benefited.

영어MSG,9 Don’t be lured away from him by the latest speculations about him. The grace of Christ is the only good ground for life. Products named after Christ don’t seem to do much for those who buy them.

영어NRSV,9 Do not be carried away by all kinds of strange teachings; for it is well for the heart to be strengthened by grace, not by regulations about food, which have not benefited those who observe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9 διδαχαις ποικιλαις και ξεναις μη περιφερεσθε καλον γαρ χαριτι βεβαιουσθαι την καρδιαν ου βρωμασιν εν οις ουκ ωφεληθησαν οι περιπατησαντες

라틴어Vulgate,9 doctrinis variis et peregrinis nolite abduci optimum enim est gratia stabiliri cor non escis quae non profuerunt ambulantibus in eis

히브리어Modern,9 אל תנועו בתורות שנות וזרות כי טוב לכונן לבנו בחסד ולא בעניני מאכל אשר לא הועילו למתהלכים בהם׃

성 경: [히13:9]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 저자는 본문에서 수신자들에게 다른 교훈에 빠지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식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마신'(*)은 9:10에서 사용된 ‘먹는 것’과 동일한 단어로 이상한 교훈을 전하는자들은 이러한 식물을 통한 의식이나 규례에 의해서 온전하여지고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거짓된 여러 가지 다른 교훈은 엣세네파(Essenes)나 그와 비슷한 종파와 연관된 혼합주의적인 영지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Bruce, Hughes). 그러나 ‘식물’은 육체에 제한된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온전한 것을 이루실 때까지 허락된 예법에 블과한 것이었다(9:10). 그러기에 식물과 의식을 통해서는 전혀 어떠한 유익도 가져다 줄 수 없으며 온전히 깨끗게 할 수 없고 단지 외적인 것만을 정결케 할뿐양심을 정결케 할 수 없다(9:13,14).

󰃨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유익과 풍성함은 식물과 그에 따른 의식을 지킴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효능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2:9)과 기도를 통해서(4:16)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은혜에 의해서만 온전하여질 수 있으며 거짓 가르침이 말하는 것처럼 식물이나 그 의식에 의해서 온전해질 수 없으니 그 식물과 그에 따른 규례는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도래할 때까지로 제한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에코멘 뒤시아스테리온 엨스 후 파게인 우크 에쿠신 엨수시안 호이 테 스케네 라트류온테스

개역개정,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새번역,10 우리에게는 한 제단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성전에서 섬기는 사람들은 우리의 이 제단에 놓은 제물을 먹을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말성경,10 우리에게는 한 제단이 있습니다. 그런데 장막에서 섬기는 사람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습니다.

가톨릭성경,10 우리에게는 제단이 있는데, 성막에 봉직하는 이들은 이 제단의 음식을 먹을 권리가 없습니다.

영어NIV,10 We have an altar from which those who minister at the tabernacle have no right to eat.

영어NASB,10 We have an altar, from which those who serve the tabernacle have no right to eat.

영어MSG,10 The altar from which God gives us the gift of himself is not for exploitation by insiders who grab and loot.

영어NRSV,10 We have an altar from which those who officiate in the tent have no right to eat.

헬라어신약Stephanos,10 εχομεν θυσιαστηριον εξ ου φαγειν ουκ εχουσιν εξουσιαν οι τη σκηνη λατρευοντες

라틴어Vulgate,10 habemus altare de quo edere non habent potestatem qui tabernaculo deserviunt

히브리어Modern,10 יש לנו מזבח אשר אינם רשאים לאכל מעליו משרתי המשכן׃

성 경: [히13:10]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 혹자는 ‘제단’의 헬라어 ‘뒤시아스테리온'(*)이 문자적인 희생 제단 자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나(Hewitt) 그것은 ‘희생 제사’에 대한 환유(換喩)로(Bruce, Lane)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인 사역에 대해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8:1-5; 9:11-14,24-26; 10:11,12). 이것은 은유적으로 영문 밖에서 당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암시한다(12절; 12:2, Spicq, Montefiore,W. Manson, Andriessen). 십자가상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구원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은혜를 유지하는 원천이 된다(Bruce). 그러기에 새 언약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음식이나 그에 따른 급례에 의해서 거룩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희생 제사에 의해서 거룩해지며(12절; 9:14; 10:10,14) 그 제단은 레위기에 규정된 법을 따르는 제사장들이나 유대인들은 전혀 참여할 수 없으며 맛볼 수 없는 것이었다(6:5, Kuss).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 제사는 구약에서 규정한 제사 규례나 정결 규례보다 훨씬 우월한 것이며 온전케하는 것이다. 한편 혹자는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를 문자적으로 신약 시대의 성만찬과 연결지어 제단을 성만찬 식탁으로 해석한다(Schroger).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본절 내에 성만찬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볼 때 타당하지 않다.

혼 가르 에이스페레타이 조온 토 하이마 페리 하마르티아스 에이스 타 하기아 디아 투 아르키에레오스 투톤 타 소마타 카타카이에타이 엨소 테스 파렘볼레스

개역개정,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새번역,11 유대교의 제사의식에서 대제사장은 속죄제물로 드리려고 짐승의 피를 지성소에 가지고 들어가고, 그 몸은 진영 밖에서 태워버립니다.

우리말성경,11 이는 그 짐승의 피는 죄를 위해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갖고 들어가고 그 몸은 진 밖에서 불태워지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11 대사제는 짐승들의 피를 속죄 제물로 성소 안에 가져갑니다. 그러나 그 짐승들의 몸은 진영 밖에서 태웁니다.

영어NIV,11 The high priest carries the blood of animals into the Most Holy Place as a sin offering, but the bodies are burned outside the camp.

영어NASB,11 For the bodies of those animals whose blood is brought into the holy place by the high priest as an offering for sin, are burned outside the camp.

영어MSG,11 In the old system, the animals are killed and the bodies disposed of outside the camp. The blood is then brought inside to the altar as a sacrifice for sin.

영어NRSV,11 For the bodies of those animals whose blood is brought into the sanctuary by the high priest as a sacrifice for sin are burned outside the camp.

헬라어신약Stephanos,11 ων γαρ εισφερεται ζωων το αιμα περι αμαρτιας εις τα αγια δια του αρχιερεως τουτων τα σωματα κατακαιεται εξω της παρεμβολης

라틴어Vulgate,11 quorum enim animalium infertur sanguis pro peccato in sancta per pontificem horum corpora cremantur extra castra

히브리어Modern,11 כי הבהמות אשר הובא דמן בקדש לכפרת החטא על ידי הכהן הגדול גויתיהן נשרפו מחוץ למחנה׃

성 경: [히13:11]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밖에서 불사름이니라 – 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은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 갔으며(레 16:14,15) 희생 제물의 시체는 영문 밖에서 불살라 버렸다(레 16:27). 한편 ‘영문 밖에서’라 함은 다음 절에서 언급될 그리스도의 고난의 장소를 암시한다. 구약의 성소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예시하는 제단에서 먹을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하며 여전히 구약의 제의에 따라 사는 자들은 골고다에서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성취된 속죄 사역의 결과인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수 없다(Lane).

디오 카이 예수스 히나 하기아세 디아 투 이디우 하이마토스 톤 라온 엨소 테스 퓔레스 에파덴

개역개정,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새번역,12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말성경,12 이와 같이 예수께서도 자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12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영어NIV,12 And so Jesus also suffered outside the city gate to make the people holy through his own blood.

영어NASB,12 Therefore Jesus also, that He might sanctify the people through His own blood, suffered outside the gate.

영어MSG,12 It’s the same with Jesus. He was crucified outside the city gates–that is where he poured out the sacrificial blood that was brought to God’s altar to cleanse his people.

영어NRSV,12 Therefore Jesus also suffered outside the city gate in order to sanctify the people by his own blood.

헬라어신약Stephanos,12 διο και ιησους ινα αγιαση δια του ιδιου αιματος τον λαον εξω της πυλης επαθεν

라틴어Vulgate,12 propter quod et Iesus ut sanctificaret per suum sanguinem populum extra portam passus est

히브리어Modern,12 בעבור זאת גם ישוע למען קדש בדמו את העם ענה מחוץ לשער׃

성 경: [히13:12]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으니라 – 저자는 본절에서 ‘영문 밖에서’ 희생 제물을 불살라 버린 것과(11절) 성문 밖에서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고난을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Lane). (1) 성문 밖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속죄일의 속죄제를 나타내는 것으로(J. Jeremias). 예수의 고난이 대제사장적인 속죄 사역을 성취하기 위한 새로운 조건임을 시사한다(10:12). (2) 예수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은 거룩한 영역으로부터 배제당하는 수치를 나타낸다. 그것은 산헤드린에 의해서 예수께서 정죄받으심은 물론 백성들에 의해 배척(排斥) 당하심과 급기야 처형 당하심을 시사한다. 한편 ‘거룩케하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세'(*)는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에 의해서 드려진 제사가 제시하지 못했던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로운 방법을 시사하는 것으로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만 거룩해질 수 있음을 나타낸다.

토이뉜 엨세르코메다 프로스 아우톤 엨소 테스 파렘볼레스 톤 오네이디스몬 아우투 페론테스

개역개정,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새번역,13 그러하므로 우리도 진영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집시다.

우리말성경,13 그러므로 우리도 그분의 치욕을 짊어지고 진 밖으로 그분에게 나아갑시다.

가톨릭성경,13 그러니 진영 밖으로 그분께 나아가 그분의 치욕을 함께 짊어집시다.

영어NIV,13 Let us, then, go to him outside the camp, bearing the disgrace he bore.

영어NASB,13 Hence, let us go out to Him outside the camp, bearing His reproach.

영어MSG,13 So let’s go outside, where Jesus is, where the action is–not trying to be privileged insiders, but taking our share in the abuse of Jesus.

영어NRSV,13 Let us then go to him outside the camp and bear the abuse he endured.

헬라어신약Stephanos,13 τοινυν εξερχωμεθα προς αυτον εξω της παρεμβολης τον ονειδισμον αυτου φεροντες

라틴어Vulgate,13 exeamus igitur ad eum extra castra inproperium eius portantes

히브리어Modern,13 לכן נצאה נא אליו אל מחוץ למחנה ונשא את חרפתו׃

성 경: [히13:13]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 그런즉 우리는…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 ‘영문 밖’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그것이 지상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천상적인 영역으로의 이동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Thompson). (2) 혹자는 그것이 유대교를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ewitt, Morris, Bruce, Hughes, Westcott, Filson).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유대인들은 ‘영문’을 거룩한 것으로, ‘영문 밖’을 더럽고 부정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영문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은(12절)거룩한 영역에서 제외 되었으며 부정하고 부끄러운 것로 이해되었다(레 13:46; 민5:2-4; 신 23:11; 눅 6:22). 그러나 전에 거룩하던 영문은 부정하여졌고, 전에 부정하던 영문 밖은 거룩하여졌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영문에서 쫓겨나 영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이다(Bruce). 따라서 저자는 아직도 옛 언약과 유대교의 범주인 영문 안에 머물러 있지 말고 이제 새 언약과 그리스도가 계신 영문 밖으로 나아갈 것을 권면하고 있다.

󰃨 그 능욕을 지고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영문 밖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조건을 나타낸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능욕을 지는 일’ 즉 유대교를 떠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동일한 고난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 곧 십자가 상의 죽음은 이방인들에게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며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신 21:22,23; 갈 3:13,Hewitt, Morris).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기 위해서 그와 동일하게 수치와 치욕으로 이해된 십자가를 짐으로 그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제자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는 복음서의 제자도와 동일하다(마10:37,38; 막 8:34-38).

우 가르 에코멘 호데 메누산 폴린 알라 텐 멜루산 에피제투멘

개역개정,14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새번역,14 사실, 우리에게는 이 땅 위에 영원한 도시가 없고, 우리는 장차 올 도시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말성경,14 우리는 이 땅 위에 영원한 도시가 아니라 다만 장차 올 도시를 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14 사실 땅 위에는 우리를 위한 영원한 도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올 도성을 찾고 있습니다.

영어NIV,14 For here we do not have an enduring city, but we are looking for the city that is to come.

영어NASB,14 For here we do not have a lasting city, but we are seeking the city which is to come.

영어MSG,14 This “insider world” is not our home. We have our eyes peeled for the City about to come.

영어NRSV,14 For here we have no lasting city, but we are looking for the city that is to come.

헬라어신약Stephanos,14 ου γαρ εχομεν ωδε μενουσαν πολιν αλλα την μελλουσαν επιζητουμεν

라틴어Vulgate,14 non enim habemus hic manentem civitatem sed futuram inquirimus

히브리어Modern,14 כי פה אין לנו עיר עמדת כי את העתידה אנחנו מבקשים׃

성 경: [히13:14]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영문 밖에 나아가기 위해서 ‘능욕’을 기꺼이 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생활하는 이 세상이나 유대교 안에는 영구한 하늘의 도성은 없으며 단지 일시적인 도성만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장차 올 도성은 사라질 도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경영하시는 터가 있는 도성(11:10,16) 곧 하늘의 도성이다. 그들은 하늘에 기록된 천국 시민이기 때문에 오직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고 이 세상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나그네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

디 아우투 운 아나페로멘 뒤시안 아이네세오스 디아 판토스 토 데오 퉅 에스틴 카르폰 케일레온 호몰로군톤 토 오노마티 아우투

개역개정,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새번역,15 그러니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립시다. 이것은 곧 그의 이름을 고백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우리말성경,15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통해 항상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립시다. 이것은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가톨릭성경,15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하여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제물을 바칩시다. 그것은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영어NIV,15 Through Jesus, therefore, let us continually offer to God a sacrifice of praise–the fruit of lips that confess his name.

영어NASB,15 Through Him then, let us continually offer up a sacrifice of praise to God, that is, the fruit of lips that give thanks to His name.

영어MSG,15 Let’s take our place outside with Jesus, no longer pouring out the sacrificial blood of animals but pouring out sacrificial praises from our lips to God in Jesus’ name.

영어NRSV,15 Through him, then, let us continually offer a sacrifice of praise to God, that is, the fruit of lips that confess his name.

헬라어신약Stephanos,15 δι αυτου ουν αναφερωμεν θυσιαν αινεσεως διαπαντος τω θεω τουτεστιν καρπον χειλεων ομολογουντων τω ονοματι αυτου

라틴어Vulgate,15 per ipsum ergo offeramus hostiam laudis semper Deo id est fructum labiorum confitentium nomini eius

히브리어Modern,15 לכן נקריב על ידו בכל עת זבח תודה לאלהים היא פרי שפתים המודות לשמו׃

성 경: [히13:15,16]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맘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 ‘예수로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 아우투'(*)는 문자적으로 ‘그로말미암아’라는 의미로 두 가지를 의미한다. (1)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찬미의 제사가 옛 언약의 제사장들에 의해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려지는 것임을 의미한다. (2)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제사는 더 이상 옛 언약의 제사장들이 드렸던 동물 희생 제사가 아님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의해 온전한 희생제사가 단번에 드려졌으므로 더 이상 속죄를 위한 동물 희생 제사를 필요로 하지 않기때문이다. 도리어 그리스도인들이 드려야 할 제사는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찬미하는 제사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찬미의 제사를 드린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희생 제사가 하나님께 온전하게 열납되었음을 시사한다(Hewitt). 한편 ‘항상’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드려지는 찬미의 제사가 지속적이어야 함을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끊이지 않고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계속적으로 경험할 때 가능하며 하나님의 약속의 불변성을 확신할 때 이루어진다(Lane).

󰃨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옅매니라 – 본문은 호 14:2(LXX)의 인용으로 ‘찬미의 제사’에 대한 설명이다. ‘입술의 열매’는 감사제와 감사 찬송시 사용하는 ‘말’에 대한 셈어적인 표현이다(잠 10:31; 12:14; 13:2; 18:20).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제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고 드러내는 찬양으로서(LXX 시 49:23)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와 선함에 대한 응답이며 하나님과의 계약을 진실하게 이행할 수있도록 하는 조건이다(Lane, Morris, Bruce).

󰃨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 저자는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이 ‘찬미의 제사’뿐 아니라 사랑의 행위도 하나님께 드려야 함을 역설한다. ‘선을 행함’의 헬라어 ‘유포이이아스'(*)는 타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모든 친절한 행위를 가리키며, ‘서로 나눠 주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스'(*)는 돈이나 물건은 물론 타인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나누는 관용(寬容)을 가리킨다(Morris, Lane, J.Y.Campbell). 타인을 사랑하는 실제적인 행위가 없는 찬미의 제사는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사랑의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Thuren).

󰃨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행위를 동반한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이유이다. 친절과 관용 그리고 찬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새 언약하에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요구하시는 예배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말’로는 물론 ‘행함’으로 제사를 드려야한다. 하나님의 뜻은 이러한 제사를 통해서 성취되며, 하나님은 이러한 제사를 기쁜 마음로 열납하신다(Lane).

테스 데 유포이이아스 카이 코이노니아스 메 에필란다네스데 토티아우타이스 가르 뒤시아이스 유아레스테이타이 호 데오스

개역개정,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새번역,16 선을 행함과 가진 것을 나눠주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말성경,16 그리고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가톨릭성경,16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것들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입니다.

영어NIV,16 And do not forget to do good and to share with others, for with such sacrifices God is pleased.

영어NASB,16 And do not neglect doing good and sharing; for with such sacrifices God is pleased.

영어MSG,16 Make sure you don’t take things for granted and go slack in working for the common good; share what you have with others. God takes particular pleasure in acts of worship–a different kind of “sacrifice”–that take place in kitchen and workplace and on the streets.

영어NRSV,16 Do not neglect to do good and to share what you have, for such sacrifices are pleasing to God.

헬라어신약Stephanos,16 της δε ευποιιας και κοινωνιας μη επιλανθανεσθε τοιαυταις γαρ θυσιαις ευαρεστειται ο θεος

라틴어Vulgate,16 beneficientiae autem et communionis nolite oblivisci talibus enim hostiis promeretur Deus

히브리어Modern,16 ואל תשכחו לגמל חסד ולתת לאביונים כי זבחים כאלה יערבו לאלהים׃

페이데스데 토이스 헤구메노이스 휘몬 카이 휘페이케테 아우토이 가르 아그륖누신 휘페르 톤 프쉬콘 휘몬 호스 로곤 알뤼시텔레스 히나 메타 카라스 투토 포이오신 카이 메 스테나존테스 가르 휘민 투토

개역개정,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새번역,17 여러분의 지도자들의 말을 곧이듣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의 영혼을 지키는 사람들이요, 이 일을 장차 하나님께 보고드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이 일을 하게 하고, 탄식하면서 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들이 탄식하면서 일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말성경,17 여러분을 인도하는 사람들을 신뢰하고 순종하십시오. 이는 그들이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께 아뢰야 할 사람들인 것처럼 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로 기쁨으로 이 일을 행하게 하고 근심함으로 행하지 않게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7 지도자들의 말을 따르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하느님께 셈을 해 드려야 하는 이들로서 여러분의 영혼을 돌보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탄식하는 일 없이 기쁘게 이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들의 탄식은 여러분에게 손해가 됩니다.

영어NIV,17 Obey your leaders and submit to their authority. They keep watch over you as men who must give an account. Obey them so that their work will be a joy, not a burden, for that would be of no advantage to you.

영어NASB,17 Obey your leaders, and submit to them; for they keep watch over your souls, as those who will give an account. Let them do this with joy and not with grief, for this would be unprofitable for you.

영어MSG,17 Be responsive to your pastoral leaders. Listen to their counsel. They are alert to the condition of your lives and work under the strict supervision of God. Contribute to the joy of their leadership, not its drudgery. Why would you want to make things harder for them?

영어NRSV,17 Obey your leaders and submit to them, for they are keeping watch over your souls and will give an account. Let them do this with joy and not with sighing–for that would be harmful to you.

헬라어신약Stephanos,17 πειθεσθε τοις ηγουμενοις υμων και υπεικετε αυτοι γαρ αγρυπνουσιν υπερ των ψυχων υμων ως λογον αποδωσοντες ινα μετα χαρας τουτο ποιωσιν και μη στεναζοντες αλυσιτελες γαρ υμιν τουτο

라틴어Vulgate,17 oboedite praepositis vestris et subiacete eis ipsi enim pervigilant quasi rationem pro animabus vestris reddituri ut cum gaudio hoc faciant et non gementes hoc enim non expedit vobis

히브리어Modern,17 שמעו אל מנהיגיכם והכנעו מפניהם כי שקדים הם על נפשתיכם כעתידים לתת חשבון למען יעשו זאת בשמחה ולא באנחה כי זאת לא להועיל לכם׃

성 경: [히13:17]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지도자를 위한 기도]

󰃨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 본절의 ‘인도하는 자’는 7절의 ‘죽은 지도자’와는 달리 현재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인도하는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저자가 반복적으로 지도자들에 대해 복종할 것을 강조하는 것은(7,24절) 당시 배교의 위험과 이해 관계에 직면하여 지도자들을 잘 따르지 아니하고 대적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2:1-4; 3:7-12; 5:11-6:12; 10:23-29; 12:12-17,25-29, Hewitt,Lane, Riggenbach).

󰃨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 본문은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존경을 받고 복종함을 받는 근거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도자들에게 부여하신 목회적 권위와 책임감이다. ‘경성하기를’의 헬라어 ‘아그뤼프누신'(*)은 양떼들을 돌보기 위해 밤을 지새우는 목자상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단어로 신약성경에서 주로 종말론적인 ‘깨어 있음’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막 13:33; 눅 21:36; 엡 6:18, Spicq, Bruce, Morris).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영혼 즉 그들의 영적 생활과 복리를 위해서(10:39, Morris,Bruce, Michel) 날마다 깨어 있어 돌보는 자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존경과 순종을 받을 만한 권위가 있다. 한편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는 지도자들의 책임을 나타낸다. 참된 지도자들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책임 이행에 대한 답을 요구하실 때 응답해야만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어서 거짓 교사들과 같이 이상한 다른 가르침을 전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파하며 그리스도인을 돌보고 양육한다.

󰃨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지도자들을 섬기고 순종해야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것은 지도자들이 양떼들을 돌보기 위해서 경성(警醒)하는 것이 즐거움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의 불순종과 고집으로 인해서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이행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근심스러운 일이 된다면 그 지도자의 인도함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Bruce, Hewitt, Morris).

프로슈케스데 페리 헤몬 페리도메다 가르 호티 칼렌 쉬네이데신 에코멘 엔 파신 칼로스 델론테스 아나스트레페스다이

개역개정,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새번역,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는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한 점도 없다고 확신합니다. 모든 일에 바르게 처신하려고 합니다.

우리말성경,18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는 모든 일을 올바르게 행하며 선한 양심을 갖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가톨릭성경,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는 모든 면에서 늘 올바로 처신하려고 하기에 바른 양심을 지니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영어NIV,18 Pray for us. We are sure that we have a clear conscience and desire to live honorably in every way.

영어NASB,18 Pray for us, for we are sure that we have a good conscience, desiring to conduct ourselves honorably in all things.

영어MSG,18 Pray for us. We have no doubts about what we’re doing or why, but it’s hard going and we need your prayers. All we care about is living well before God.

영어NRSV,18 Pray for us; we are sure that we have a clear conscience, desiring to act honorably in all things.

헬라어신약Stephanos,18 προσευχεσθε περι ημων πεποιθαμεν γαρ οτι καλην συνειδησιν εχομεν εν πασιν καλως θελοντες αναστρεφεσθαι

라틴어Vulgate,18 orate pro nobis confidimus enim quia bonam conscientiam habemus in omnibus bene volentes conversari

히브리어Modern,18 התפללו בעדנו כי ידענו אשר שלמה מחשבתנו ונחפץ ללכת דרך ישרה בכל׃

성 경: [히13:18]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지도자를 위한 기도]

󰃨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 1인칭 복수인 ‘우리’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우리’가 순수한 복수로 저자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Westcott, Kent). (2) 혹자는 ‘우리’가 서간체 복수로 저자 자신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ewitt, Bruce).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Morris). 왜냐하면 다음 절에서 1인칭 단수인 ‘내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도자로서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수신자들에게 부탁하고 있다.

󰃨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 개역성경에는 ‘가르'(*,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본문 즉 저자가 가지고 있는 ‘선한 양심’이 수신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할 수 있는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 ‘더럽혀진 양심’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므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져야 한다(9:14). 저자가 본절에서 자신의 ‘선한 양심’에 대해 확신하는 것은 자신을 향한 타인의 비방에 대한 방어책으로(Morris, Lane, Hewitt) 저자 자신이 지도자로서 선한 행동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의무를 잘 수행하였음을 시사한다(Bruce).

페리쏘테로스 데 파라칼로 투토 포이에사이 히나 타키온 아포카타스타도 휘민

개역개정,19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새번역,19 내가 여러분에게 좀더 속히 돌아가게 되도록 기도하여 주시기를 더욱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우리말성경,19 내가 여러분에게 더 빨리 돌아갈 수 있도록 더욱 열심히 기도해 주십시오.

가톨릭성경,19 내가 여러분에게 빨리 돌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기를 더욱 간곡히 부탁합니다.

영어NIV,19 I particularly urge you to pray so that I may be restored to you soon.

영어NASB,19 And I urge you all the more to do this, that I may be restored to you the sooner.

영어MSG,19 Pray that we may be together soon.

영어NRSV,19 I urge you all the more to do this, so that I may be restored to you very soon.

헬라어신약Stephanos,19 περισσοτερως δε παρακαλω τουτο ποιησαι ινα ταχιον αποκατασταθω υμιν

라틴어Vulgate,19 amplius autem deprecor vos hoc facere ut quo celerius restituar vobis

히브리어Modern,19 ובחזקה אבקש מכם לעשות זאת למען אושב אליכם במהרה׃

성 경: [히13:19]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지도자를 위한 기도]

󰃨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 – 저자는 본절에서 수신자들이 속한 공동체에 다시 방문할 수 있도록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한다. 재방문을 위한 기도 요청은 저자와 수신자들간에 개인적으로 상당한 친분 관계가 있었으며(Hewitt, Lane) 또한 저자가 수신자 공동체를 방문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방문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저자의 투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Hewitt, Morris, Bruce). 왜냐하면 23절에서 디모데가 감옥에서 나오면 함께 방문할 것이라고 함으로써 자신이 감옥에 투옥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저자가 수신자 공동체에 방문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확실히 있으나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호 데 데오스 테스 에이레네스 호 아나가곤 에크 네크론 톤 포이메나 톤 프로바톤 톤 메간 엔 하이마티 디아데케스 아이오니우 톤 퀴리온 헤몬 예순

개역개정,20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새번역,20 영원한 언약의 피를 흘려서 양들의 위대한 목자가 되신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화의 하나님이

우리말성경,20 평강의 하나님, 곧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영원한 언약의 피로 이끌어 내신 분이

가톨릭성경,20 영원한 계약의 피로, 양들의 위대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끌어올리신 평화의 하느님께서

영어NIV,20 May the God of peace, who through the blood of the eternal covenant brought back from the dead our Lord Jesus, that great Shepherd of the sheep,

영어NASB,20 Now the God of peace, who brought up from the dead the great Shepherd of the sheep through the blood of the eternal covenant, even Jesus our Lord,

영어MSG,20 May God, who puts all things together, makes all things whole, Who made a lasting mark through the sacrifice of Jesus, the sacrifice of blood that sealed the eternal covenant, Who led Jesus, our Great Shepherd, up and alive from the dead,

영어NRSV,20 Now may the God of peace, who brought back from the dead our Lord Jesus, the great shepherd of the sheep, by the blood of the eternal covenant,

헬라어신약Stephanos,20 ο δε θεος της ειρηνης ο αναγαγων εκ νεκρων τον ποιμενα των προβατων τον μεγαν εν αιματι διαθηκης αιωνιου τον κυριον ημων ιησουν

라틴어Vulgate,20 Deus autem pacis qui eduxit de mortuis pastorem magnum ovium in sanguine testamenti aeterni Dominum nostrum Iesum

히브리어Modern,20 ואלהי השלום אשר בדם ברית עולם העלה מן המתים את רעה הצאן הגדול את ישוע אדנינו׃

성 경: [히13:20,21]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마지막 권고와 축복]

본문은 송영이다.

󰃨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 본문은 사 63:11의 ‘백성과 양 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를 인용한 것이다. 이사야 본문은 모세에 대한 진술이다. 저자는 모세에 대한 진술인 이사야 본문을 인용하여 미디안의 목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 부터 이끌어 낸 모세를 유형론적으로 해석하여 ‘양의 큰 목자’이신 예수께 적용하고 있다(Lane, Bruce). ‘큰’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메간'(*)은 본서에서 예수의 우월성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으며(4:14; 10:21) 모세와 예수의 비교 또한 새 언약의 중재자인 예수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저자의 독특한 논증 방법이었다(1:1-4; 2:1-4; 3:1-6; 8:1-6; 10:26-31;12:18-29). 저자는 예수께 ‘큰 목자’라는 칭호를 부여함으로 사 63:11에서 모세에게 칭한 ‘양 무리의 목자’와 대조를 이루게하며 옛 언약의 중재자인 모세보다 새 언약의 중재자인 예수께서 더 위대하심을 강조하고 있다.

󰃨 영원한 언약의 피로 – 본문은 슥 9:11(LXX)의 영향을 받았다. ‘언약의 피’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언약의 희생 제사임을 시사하며(9:20; 출 24:8) ‘영원한’은 예수의 속죄 사역이 영원한 효력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1:8; 5:6,9; 6:20; 9:12,14,15;10:12,14). 예수의 사역과 희생은 영원한 언약을 이루는 근거가 되었으며 이러한 영원한 언약은 새 언약과 동일한 것으로 옛 언약올 대신하였다. 본문은 다음에 언급될 예수의 부활과 연결된 것으로, 예수의 부활은 예수께서 자신의 희생으로 이루신 영원한 언약을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셨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통해서 영원히 살아계심을 나타낸다(9:20, Morris, Hewitt, Lane).

󰃨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 본문은 본서 내에서 부활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유일한 구절이다. 예수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정하고 비준(批准)하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을 통해서 이루어졌다(Michel, Cranfield, Thuren). 한편 ‘이끌어내신’의 헬라어 ‘아나가곤'(*)은 두 언약 즉 옛 언약과 새 언약하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나타낸다.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신 하나님의 간섭은(출 6:7; 20:1,2; 레 19:36; 25:38; 26:13; 신 5:6; 사63:11-14) 죽은 자로부터 예수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행위를 예표한다(Lane).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심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새로운 언약 즉 영원한 언약을 맺으시는 근거가 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근거가 된다(21절, Cranfield,Thuren).

󰃨 평강의 하나님이 – 이 칭호는 구약성경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인들이 만든 하나님의 칭호라고 볼 수 있으며(Lane) 하나님께서 평화의 근원이시며 수여자이심을 시사한다. 또한 이것은 수신자 공동체 가운데 배교의 위험과 지도자와의 불협화음이 있었음을 암시한다(Bruce, Morris, Hewitt). 그래서 저자는 송영에서 수신자 공동체에게 하나님께서 ‘평화의 하나님’이심을 상기시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위해 서로간의 불화를 억제하고 지도자에게 순복하여 평안을 이룰 것을 강조한다(17절, Spicq, Thuren, Morris, Bruce).

󰃨 모든 선한 일에 너희들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 ‘모든 선한 일에’의 헬라어 ‘엔 판티아가도'(*)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윤리적인 선한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 선한 윤리적인 행위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Spicq). (2) 혹자는 선한 일을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한다(살후 2:17, Michel). (3)혹자는 선한 일을 ‘하나님의 선한 선물’로 해석한다(마 7:11; 눅 1:53; 갈 6:6; 약1:17, Lane, Morris).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문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저자는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수신자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은혜로 공급하여 주셔서 온전하게 함으로 하나님 자신의 뜻을 행할수 있도륵 하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 본문은 앞서 언급된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와 상호 보완적이다. ‘즐거운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며(12:28)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도록(15,16절) 부름을 받은 존재임을 시사한다.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중재자이시며 새 언약 공동체 내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중재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Lane,Morris).

󰃨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륵 있을지어다 아멘 – ‘그에게’에 대해서 혹자는 문법적으로 ‘하나님’이나 ‘예수’와 모두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둘 다를 가리킬 수 있다고 주장하나(Morris)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Bruce). 왜냐하면 본문의 송영은 죽은 자로부터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응답이기 때문이다(Lane).

카타르티사이 휘마스 엔 판티 아가도 에이스 토 포이에사이 토 델레마 아우투 포이온 엔 헤민 토 유아레스톤 에노피온 아우투 디아 예수 크리스투 호 헤 돜사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톤 아이오논 아멘

개역개정,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새번역,21 여러분을 온갖 좋은 일에 어울리게 다듬질해 주셔서 자기의 뜻을 행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 자기가 기뻐하시는 바를 이루시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이 영원무궁히 있기를 빕니다. 아멘.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여러분에게’

우리말성경,21 그분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모든 선한 것으로 여러분을 온전케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우리 안에서 행하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가톨릭성경,21 여러분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시어 여러분이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우리에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영어NIV,21 equip you with everything good for doing his will, and may he work in us what is pleasing to him, through Jesus Christ, to whom be glory for ever and ever. Amen.

영어NASB,21 equip you in every good thing to do His will, working in us that which is pleasing in His sight, through Jesus Christ, to whom be the glory forever and ever. Amen.

영어MSG,21 Now put you together, provide you with everything you need to please him, Make us into what gives him most pleasure, by means of the sacrifice of Jesus, the Messiah. All glory to Jesus forever and always! Oh, yes, yes, yes.

영어NRSV,21 make you complete in everything good so that you may do his will, working among us that which is pleasing in his sight, through Jesus Christ, to whom be the glory forever and ever. Amen.

헬라어신약Stephanos,21 καταρτισαι υμας εν παντι εργω αγαθω εις το ποιησαι το θελημα αυτου ποιων εν υμιν το ευαρεστον ενωπιον αυτου δια ιησου χριστου ω η δοξα εις τους αιωνας των αιωνων αμην

라틴어Vulgate,21 aptet vos in omni bono ut faciatis voluntatem eius faciens in vobis quod placeat coram se per Iesum Christum cui gloria in saecula saeculorum amen

히브리어Modern,21 הוא ישלימכם בכל מעשה טוב לעשות רצונו בפעלו בכם את הרצוי לפניו ביד ישוע המשיח אשר לו הכבוד לעולמי עולמים אמן׃

파라칼로 데 휘마스 아델포이 아네케스데 투 로구 테스 파라클레세오스 카이 가르 디아 브라케온 에페스테일라 휘민

개역개정,2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새번역,22 ㉥형제자매 여러분, 부디 이 권면의 말을 받아들이기를 권유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짤막하게 썼습니다. / ㉥그, ‘형제들’

우리말성경,22 형제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이 권면의 말을 용납하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간단히 썼습니다.

가톨릭성경,22 형제 여러분, 이렇게 간단히 적어 보내니 이 격려의 말을 잘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영어NIV,22 Brothers, I urge you to bear with my word of exhortation, for I have written you only a short letter.

영어NASB,22 But I urge you, brethren, bear with this word of exhortation, for I have written to you briefly.

영어MSG,22 Friends, please take what I’ve written most seriously. I’ve kept this as brief as possible; I haven’t piled on a lot of extras.

영어NRSV,22 I appeal to you, brothers and sisters, bear with my word of exhortation, for I have written to you briefly.

헬라어신약Stephanos,22 παρακαλω δε υμας αδελφοι ανεχεσθε του λογου της παρακλησεως και γαρ δια βραχεων επεστειλα υμιν

라틴어Vulgate,22 rogo autem vos fratres sufferatis verbum solacii etenim perpaucis scripsi vobis

히브리어Modern,22 ואבקש מכם אחי שאו נא דבר התוכחה כי כתבתי אליכם בקצרה׃

성 경: [히13:22]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마지막 권고와 축복]

󰃨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 ‘형제들아’와 ‘용납하라’는 말은 저자가 앞서 기술한 배교나 비그리스도인에 대한 격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진술, 그리고 지도자와 수신자들 사이의 갈등에 대한 훈계와 비교되어 부드럽고 애정이 서려 있다. 본문에서 저자는 이제까지 진술한 내용을 ‘권면의 말’이라고 정의함으로 자신이 이제까지 진술한 것이 책망보다는 격려차 위로에 기인한 것이었음을 밝히고 다시 한번 본서의 내용에 주목해 줄 것을 암시하고 있다. ‘권면의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로구 테스 파라클레세오스'(*)는 행 13:15에 나오는 표현과 유사한 것으로 ‘설교를’ 지칭한다(Bruce, Morris, Lane). 한편 ‘간단히…썼느니라’가 가리키는 부분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13:18-25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Knox).(2) 혹자는 13장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R. Anderson). (3) 혹자는 본서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rris, bruce, Hewitt, Lane).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썼느니라’의 헬라어 ‘에페스테일라'(*)는 ‘편지를 썼다’라는 의미로 본 서신 전체를 가리키며, ‘간단히 썼다’는 것은 유대 문서나 초기 그리스도인 문서에서 공손함을 나타내는 문학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Hewitt, Lane).

기노스케테 톤 아델폰 헤몬 티모데온 아포렐뤼메논 멛 후 에안 타키온 에르케타이 옾소마이 휘마스

개역개정,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새번역,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풀려나온 것을 알려드립니다.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여러분을 만나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말성경,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석방된 것을 알려 드립니다.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여러분을 만나 보게 될 것입니다.

가톨릭성경,23 우리의 형제 티모테오가 풀려났음을 알려 드립니다. 그가 빨리 오면 내가 그와 함께 여러분을 만나 보게 될 것입니다.

영어NIV,23 I want you to know that our brother Timothy has been released. If he arrives soon, I will come with him to see you.

영어NASB,23 Take notice that our brother Timothy has been released, with whom, if he comes soon, I shall see you.

영어MSG,23 You’ll be glad to know that Timothy has been let out of prison. If he leaves soon, I’ll come with him and get to see you myself.

영어NRSV,23 I want you to know that our brother Timothy has been set free; and if he comes in time, he will be with me when I see you.

헬라어신약Stephanos,23 γινωσκετε τον αδελφον τιμοθεον απολελυμενον μεθ ου εαν ταχιον ερχηται οψομαι υμας

라틴어Vulgate,23 cognoscite fratrem nostrum Timotheum dimissum cum quo si celerius venerit videbo vos

히브리어Modern,23 ודעו כי טימותיוס אחינו יצא מבית האסורים והיה אם יבא במהרה אראה אתו את פניכם׃

성 경: [히13:23]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마지막 권고와 축복]

󰃨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 저자가 바울의 동역자였던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부른 것은 디모데가 수신자들에게 매우 잘 알려져 서로 교제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놓인 것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렐뤼메논'(*)은 완료 시상으로 이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사역의 임무를 부여받고 보냄을 받은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E.D. Jones). (2) 혹자는 감옥에서 풀려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Hewitt, Lane, Morri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아폴렐뤼메논’이 전자의 견해처럼 사용되었을 경우는 목적어를 동반하나 본절에서는 목적어를 동반하고 있지 않으며, 더욱이 ‘아폴렐뤼메논’이라는 단어는 흔히 감옥에서 풀려나는 경우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Brice, Morris). 그러나 디모데가 언제 어디에 있는 감옥에 갇혔었는지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디모데가 감옥에서 풀려난 사실을 먼저 알고 전하면서 디모데가 속히 올 경우 함께 방문할 것을 밝히고 있다.

아스파사스데 판타스 투스 헤구메누스 휘몬 카이 판타스 투스 하기우스 아스파존타이 휘마스 호이 아포 테스 이탈리아스

개역개정,24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새번역,24 여러분의 모든 지도자와 성도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우리말성경,24 여러분을 지도하는 모든 사람들과 온 성도들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가톨릭성경,24 여러분의 모든 지도자와 모든 성도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이탈리아에서 온 이들이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영어NIV,24 Greet all your leaders and all God’s people. Those from Italy send you their greetings.

영어NASB,24 Greet all of your leaders and all the saints. Those from Italy greet you.

영어MSG,24 Say hello to your pastoral leaders and all the congregations. Everyone here in Italy wants to be remembered to you.

영어NRSV,24 Greet all your leaders and all the saints. Those from Italy send you greetings.

헬라어신약Stephanos,24 ασπασασθε παντας τους ηγουμενους υμων και παντας τους αγιους ασπαζονται υμας οι απο της ιταλιας

라틴어Vulgate,24 salutate omnes praepositos vestros et omnes sanctos salutant vos de Italia

히브리어Modern,24 שאלו לשלום כל מנהיגיכם ולשלום כל הקדשים בני ארץ איטליא שאלים לשלומכם׃

성 경: [히13:24]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마지막 권고와 축복]

󰃨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 저자는 본문에서 앞서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인도하는 자’와의 문안을 통해서 갈등 관계가 아니라 선한 관계를 형성하여 그들에게 순복(順服)할 것을 암시한다(7,17절). 한편 ‘모든 성도’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혹자는 본서의 수신자들이 속해 있는 도시 전체의 성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ane). (2) 혹자는 본서의 수신자들이 모이는 가정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uce).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여 화평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화평을 이름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암시적으로 권면하고 있다.

󰃨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의 헬라어 ‘호이 아포테스 이탈리아스'(*)는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혹자는 당시 이탈리아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 이탈리아 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picq). (2) 혹자는 이탈리아밖에 있는 사람이 이탈리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하거나 이탈리아가 고향인 자들이이탈리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uce). ‘호이 아포 테스 이탈리아스’는 이 두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가 어렵다(Morris, Bruce, Hewitt).

헤 카리스 메타 판톤 휘몬

개역개정,25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새번역,25 여러분 모두에게 은혜가 있기를 빕니다. ㉦ / ㉦다른 고대 사본들은 절 끝에 ‘아멘’이 있음

우리말성경,25 은혜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가톨릭성경,25 은총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영어NIV,25 Grace be with you all.

영어NASB,25 Grace be with you all.

영어MSG,25 Grace be with you, every one.

영어NRSV,25 Grace be with all of you.

헬라어신약Stephanos,25 η χαρις μετα παντων υμων αμην [προς εβραιους εγραφη απο της ιταλιας δια τιμοθεου]

라틴어Vulgate,25 (없음)

히브리어Modern,25 החסד עם כלכם אמן׃

성 경: [히13:25]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마지막 권고와 축복]

󰃨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는 비록 흔히 사용되던 인사법이라 할지라도 본서를 마감하는 종결 인사로서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저자가 본서에서 계속적으로 하나님께서 구속하시고 인도하시며 도와주시는 은혜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9절; 2:9; 4:16;12:15). 저자는 마지막 인사로 수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킴으로 배교(背敎)의 위험에 처해 있는 수신자들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는 물론 지도자와 수신자들간의 갈등관계를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L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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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마 주석, 히브리서 13장

=====13: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 ‘형제 사랑’은 이웃 사랑을 강조하는 성결 법전과 연결되는 것으로(레 19:18) 믿음의 공동체 내에서 형제와 자매를 연결하여 연대감을 갖도록 하는것이다(22,23절; 2:11,12,17; 3:1,12; 10:19).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지속적으로 지녀야 할 독특한 특징이다(Lane). 저자는 당시의 수신자들 사이에 신앙이 약해진 자들을 결속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적으로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권면하고있다(Bruce, Hewitt).

=====13: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 저자는 앞절에서 권면한 ‘형제 사랑’을 더 확대하여’손님 대접’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손님 대접’에 관한 권면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을 반영한 것이다(마 25:35).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으로 인해서 복음 전도 여행과 그 여행을 위한 숙식을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손님을 대접하는것은 복음 전도 사역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다(행 21:4,7,16,17,Thuren, Morris, Hewitt). 그러기에 손님 대접에 대한 권면은 초기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메시지였으며 그들이 지켜야 할 의무였다(딤전 3:2; 딛 1:8; 벧전 4:8,9, Bruce,Lane).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 본문은 아브라함의 일을암시한다.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세 사람의 손님을 영접하고 대접하였을 때 세 손님은 사라에게 이삭의 출생에 대해 예언하였다(창 18:1-21). 본문은손님을 대접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하는 덕목임을 시사한다.

=====13:3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 본문에서 저자는 ‘형제 사랑’에서(1절) ‘손님 대접’으로(2절), ‘손님대접’에서 ‘갇힌 자와 학대받는 자에 대한 대접’으로 확대하고 있다. 당시 ‘갇힌 자들’은 심한 대우를 받아서 음식이나 의복에 대해 가족이나 친구들의 도음을 받아야만했다. 만약 가족이나 친구들의 직접적인 도움이 없다면 그들은 감옥에서 굶주려 죽어야만 했다.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이 갇힌 자들을 도와주면 그들 역시 갇힌 자와 동일한대우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자신이 갇힌 것처럼 생각하여 도와주라고한다(고전 12:26, Morris, Bruce). 한편 ‘학대받는 자’는 신앙 때문에 악한 대우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11:36,37, Lane).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신앙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소외된 자들과 연대감을 가지고 자신의 몸이 학대받는 것처럼 생각하여 그들과 교제를 나누어야한다(10:32-34; 11:36-38, Filson).

=====13:4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 ‘모든 사람’의 헬라어 ‘엔 파신'(* )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있다(Morris, Hewitt). (1) 중성으로 이해하면 단순히 성적인 순결 뿐만 아니라 모든형편 속에서 결혼을 중시하고 귀하게 여겨야 함을 시사한다. (2) 남성으로 이해하면모든 남자들이 결혼을 귀하게 여겨야 함을 시사한다. 두 가지 해석 중 전자가 더 타당하다고 그리스도인들이 성적인 범죄를 행하지 아니하는 것은 단순히 남자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며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결혼 생활 속에서 성적인 범죄를 행하지 아니하고 결혼을 귀하게 여겨야하기 때문이다. 한편 ‘침소’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코이테'(* )는 성적인 정결(淨潔)과 함께 사용된 용어로 성생활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다(Morris, Lane). 성적인 범죄를 통해 침소를 더럽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결혼을 욕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행위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신다(17절). 저자는 성적인 죄를 범하는 자에 대해 두 부류로 묘사한다.

(1) 음행하는 자들 – 이것은 결혼 외에 다른 방법으로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포함하여 모든 성적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가리킨다.

(2)간음하는 자들 – 이것은 결혼시에 표현한 서원에 불충실하여 이를 어기며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가리킨다.이러한 두 부류의 행위는 불법적인 성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Bruce, Lane, Hughes).

=====13:5,6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 돈을 사랑치 말라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주 강조된 금지 명령이다. 돈에 대한 탐욕은 타인의 권리를 생각지 아니하고 오직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게 할 뿐 아니라 마음에 두 주인을 섬기게 하여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범죄하게 만든다(마6:24; 눅 16:13; 딤전 6:10, Bruce, Thuren). 그 결과 우상 숭배의 결과를 초래하기때문에 저자는 본절에서 현재 주어진 여건과 물질에 대해 만족할 것을 권면한다. 저자는 현재 주어진 것에 대해 만족해야 할 이유 두 가지를 제시한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 본문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인용문은 없으며 단지 필로(Philo)가 동일한 인용문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On the Confusion of Tongues, p.166). 하지만 저자의 인용문과 필로의 인용문이 동일하다고 해서 저자가 필로의 것을인용했다고(Moffatt, Spicq) 생각할 이유는 없으며 도리어 다른 헬라어 역본에서 인용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Morris, Lane, Michel, Delitzsch, Riggenbach).그리스도인들이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현재 주어진 여건에 만족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켜주시고 함께 하시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창 28:15; 신31:6; 수 1:5; 사 41:17).

모든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지켜주신다는 사실은 바울과 같이 현재에 주어진 환경에 자족하게 한다(빌 4:11-13)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 본문은 시 118:6의 인용으로 앞서 언급된 인용문과 연결되어 ‘약속과 응답’의 형태를 취한다(Michel). 하나님께서 돕는 자로서 그리스도인들과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시편 기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돈과죽음의 위협으로 부터 자유로와지며 담대해질 수 있다(2:14,15, Lane). 한편 ‘사람이내게 어찌하리요’는 부정을 유도하는 수사학적 질문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를 대항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롬 8:31, Hewitt, Morris).

=====13: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 ‘인도하는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헤구메논'(* )은 본장에서 본절을 제외하고 두 번 더 나온다(17,24절). 17절과 24절은 현재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반면에 본절의 ‘톤 해구메논’은 신앙을 지키다가 죽은 지도자들을 가리킨다(Hewitt,Bruce). ‘톤 헤구메논’이 가리키는 인물에 대해 혹자는 ‘장로’라고 추측하며(Morris)혹자는 ‘주의 제자’라고 주장하나(2:3, Hewitt) 명확하지 않다. 한편 ‘인도하는 자’의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공동체 내에서나 선교 사역 때에 설교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행 4:29,31; 8:25; 13:46, 빌1:14, Michel, Riggenbach) 지도자들이 청중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하여 구원하시는 종말론적 메시지를 전달하였음을 나타낸다(1:1,2).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던 지도자들을 기억하고 더불어 그들의 신앙을 본받아야한다.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 ‘종말’의 헬라어 ‘에크바신'(* )은 매일의 생활에 대한 결과를 나타내며(Hughes, Bruce)동시에 ‘죽음’에 대한 완곡한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Moffatt, Westcott). 그리스도인들은 지도자들이 수많은 고난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신앙을 지키다가 심지어 죽기까지한 것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과거에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전하고 그 말씀에 의지하며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굳게 잡은 사실을 주의하여 살펴보고 따라야 한다.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 본문에 대한 해석은두가지이다. (1) 혹자는 본문이 이 세상의 지도자들은 죽고 사라질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변함이 없으심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Bruce, Morris).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예수께서 ‘어제’ 하나님께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5:7),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변호하시며, ‘영원토록’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간구하시고 계심을 나타낸다. (2) 혹자는 본절이 7절과 9절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Hewitt, Lane). 이 견해에 따르면 본절은 ‘어제’ 과거의 지도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그를 전파하였으며 ‘오늘’ 수신자 공동체가 ‘어제’ 전함을 받은하나님의 말씀을 이상한 가르침과(9절) 바꾸려고 하는 상태에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에의해서 주어진 구속이 ‘영원한’ 것임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13: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 저자는 본문에서 수신자들에게 다른 교훈에 빠지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식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마신'(* )은 9:10에서 사용된 ‘먹는 것’과 동일한 단어로 이상한 교훈을 전하는자들은 이러한 식물을 통한 의식이나 규례에 의해서 온전하여지고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거짓된 여러 가지 다른 교훈은 엣세네파(Essenes)나 그와 비슷한 종파와 연관된 혼합주의적인 영지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Bruce, Hughes). 그러나’식물’은 육체에 제한된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온전한 것을 이루실 때까지 허락된 예법에 블과한 것이었다(9:10). 그러기에 식물과 의식을 통해서는 전혀 어떠한 유익도 가져다 줄 수 없으며 온전히 깨끗게 할 수 없고 단지 외적인 것만을 정결케 할뿐양심을 정결케 할 수 없다(9:13,14).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유익과 풍성함은식물과 그에 따른 의식을 지킴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효능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2:9)과 기도를 통해서(4:16)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된다. 그리스도인들은오직 은혜에 의해서만 온전하여질 수 있으며 거짓 가르침이 말하는 것처럼 식물이나그 의식에 의해서 온전해질 수 없으니 그 식물과 그에 따른 규례는 오직 그리스도의구속 사역이 도래할 때까지로 제한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13:10

우리에게 제단이 잇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 혹자는 ‘제단’의 헬라어 ‘뒤시아스테리온'(* )이 문자적인 희생 제단 자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나(Hewitt) 그것은’희생 제사’에 대한 환유(換喩)로(Bruce, Lane)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인 사역에 대해언급할 때 사용되었다(8:1-5; 9:11-14,24-26; 10:11,12). 이것은 은유적으로 영문 밖에서 당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암시한다(12절; 12:2, Spicq, Montefiore,W. Manson, Andriessen). 십자가상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구원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은혜를 유지하는 원천이 된다(Bruce). 그러기에 새 언약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은음식이나 그에 따른 급례에 의해서 거룩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희생 제사에 의해서 거룩해지며(12절; 9:14; 10:10,14) 그 제단은 레위기에 규정된 법을 따르는제사장들이나 유대인들은 전혀 참여할 수 없으며 맛볼 수 없는 것이었다(6:5, Kuss).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 제사는 구약에서 규정한 제사 규례나 정결 규례보다 훨씬우월한 것이며 온전케하는 것이다. 한편 혹자는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를 문자적으로 신약 시대의 성만찬과 연결지어 제단을 성만찬 식탁으로 해석한다(Schroger).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본절 내에 성만찬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볼 때 타당하지 않다.

=====13: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밖에서 불사름이니라 – 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은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 갔으며(레 16:14,15) 희생 제물의 시체는 영문 밖에서 불살라 버렸다(레 16:27).한편 ‘영문 밖에서’라 함은 다음 절에서 언급될 그리스도의 고난의 장소를 암시한다.구약의 성소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예시하는 제단에서 먹을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하며 여전히 구약의 제의에 따라 사는 자들은 골고다에서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성취된 속죄 사역의 결과인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수 없다(Lane).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으니라 – 저자는 본절에서 ‘영문 밖에서’ 희생 제물을 불살라 버린 것과(11절) 성문 밖에서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고난을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Lane).(1) 성문 밖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속죄일의 속죄제를 나타내는 것으로(J. Jeremias).예수의 고난이 대제사장적인 속죄 사역을 성취하기 위한 새로운 조건임을 시사한다(10:12). (2) 예수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은 거룩한 영역으로부터 배제당하는 수치를 나타낸다. 그것은 산헤드린에 의해서 예수께서 정죄받으심은 물론 백성들에 의해 배척(排斥) 당하심과 급기야 처형 당하심을 시사한다. 한편 ‘거룩케하려고’에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세'(* )는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에 의해서 드려진 제사가 제시하지 못했던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로운 방법을 시사하는 것으로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만 거룩해질 수 있음을 나타낸다.

=====13:13

그런즉 우리는…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 ‘영문 밖’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그것이 지상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천상적인 영역으로의 이동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Thompson). (2) 혹자는 그것이 유대교를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주장한다(Hewitt, Morris, Bruce, Hughes, Westcott, Filson).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유대인들은 ‘영문’을 거룩한 것으로, ‘영문 밖’을 더럽고 부정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영문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은(12절)거룩한 영역에서 제외 되었으며 부정하고 부끄러운 것로 이해되었다(레 13:46; 민5:2-4; 신 23:11; 눅 6:22). 그러나 전에 거룩하던 영문은 부정하여졌고, 전에 부정하던 영문 밖은 거룩하여졌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영문에서 쫓겨나 영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이다(Bruce). 따라서 저자는 아직도 옛 언약과 유대교의 범주인 영문 안에 머물러 있지 말고 이제 새 언약과 그리스도가 계신 영문 밖으로 나아갈 것을권면하고 있다.

그 능욕을 지고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영문 밖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조건을 나타낸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능욕을 지는 일’ 즉 유대교를 떠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동일한 고난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 곧 십자가 상의 죽음은 이방인들에게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며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신 21:22,23; 갈 3:13,Hewitt, Morris). 그fl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기 위해서 그와 동일하게 수치와 치욕으로 이해된 십자가를 짐으로 그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제자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는 복음서의 제자도와 동일하다(마10:37,38; 막 8:34-38).

=====13:14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영문 밖에 나아가기 위해서 ‘능욕’을 기꺼이 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생활하는 이 세상이나 유대교 안에는 영구한 하늘의 도성은 없으며 단지 일시적인 도성만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장차 올 도성은 사라질 도성이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경영하시는 터가 있는 도성(11:10,16) 곧 하늘의 도성이다. 그들은 하늘에 기록된 천국 시민이기 때문에 오직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고 이 세상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나그네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

=====13:15,16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맘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 ‘예수로말미암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 아우투'(* )는 문자적으로 ‘그로말미암아’라는 의미로 두 가지를 의미한다. (1)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찬미의 제사가옛 언약의 제사장들에 의해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려지는 것임을 의미한다. (2)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제사는 더 이상 옛 언약의 제사장들이 드렸던 동물 희생 제사가 아님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의해 온전한 희생제사가 단번에 드려졌으므로 더 이상 속죄를 위한 동물 희생 제사를 필요로 하지 않기때문이다. 도리어 그리스도인들이 드려야 할 제사는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찬미하는 제사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찬미의 제사를 드린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희생 제사가 하나님께 온전하게 열납되었음을 시사한다(Hewitt). 한편 ‘항상’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드려지는 찬미의 제사가 지속적이어야 함을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끊이지 않고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계속적으로경험할 때 가능하며 하나님의 약속의 불변성을 확신할 때 이루어진다(Lane).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옅매니라 – 본문은 호 14:2(LXX)의 인용으로 ‘찬미의 제사’에 대한 설명이다. ‘입술의 열매’는 감사제와 감사 찬송시 사용하는 ‘말’에대한 셈어적인 표현이다(잠 10:31; 12:14; 13:2; 18:20).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제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고 드러내는 찬양으로서(LXX 시 49:23)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와 선함에 대한 응답이며 하나님과의 계약을 진실하게 이행할 수있도록 하는 조건이다(Lane, Morris, Bruce).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 저자는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이’찬미의 제사’뿐 아니라 사랑의 행위도 하나님께 드려야 함을 역설한다. ‘선을 행함’의 헬라어 ‘유포이이아스'(* )는 타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모든 친절한 행위를 가리키며, ‘서로 나눠 주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스'(* )는 돈이나 물건은 물론 타인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나누는 관용(寬容)을 가리킨다(Morris, Lane, J.Y.Campbell). 타인을 사랑하는 실제적인행위가 없는 찬미의 제사는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사랑의 행위가 동반되어야한다(Thuren).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행위를동반한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이유이다. 친절과 관용 그리고 찬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새 언약하에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요구하시는 예배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말’로는 물론 ‘행함’으로 제사를 드려야한다. 하나님의 뜻은 이러한 제사를 통해서 성취되며, 하나님은 이러한 제사를 기쁜마음로 열납하신다(Lane).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 본절의 ‘인도하는 자’는 7절의’죽은 지도자’와는 달리 현재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인도하는 ‘지도자’들을 가리킨다.저자가 반복적으로 지도자들에 대해 복종할 것을 강조하는 것은(7,24절) 당시 배교의위험과 이해 관계에 직면하여 지도자들을 잘 따르지 아니하고 대적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2:1-4; 3:7-12; 5:11-6:12; 10:23-29; 12:12-17,25-29, Hewitt,Lane, Riggenbach).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 본문은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존경을 받고 복종함을 받는 근거이다. 그것은하나님께서 지도자들에게 부여하신 목회적 권위와 책임감이다. ‘경성하기를’의 헬라어’아그뤼프누신'(* )은 양떼들을 돌보기 위해 밤을 지새우는목자상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단어로 신약성경에서 주로 종말론적인 ‘깨어 있음’을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막 13:33; 눅 21:36; 엡 6:18, Spicq, Bruce, Morris).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영혼 즉 그들의 영적 생활과 복리를 위해서(10:39, Morris,Bruce, Michel) 날마다 깨어 있어 돌보는 자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존경과 순종을 받을 만한 권위가 있다. 한편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는 지도자들의 책임을 나타낸다. 참된 지도자들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책임 이행에 대한 답을 요구하실 때 응답해야만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어서 거짓 교사들과 같이 이상한 다른 가르침을 전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파하며 그리스도인을 돌보고양육한다.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히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지도자들을 섬기고 순종해야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것은 지도자들이 양떼들을 돌보기 위해서 경성(警醒)하는 것이 즐거움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의불순종과 고집으로 인해서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이행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근심스러운 일이 된다면 그 지도자의 인도함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Bruce, Hewitt, Morris).

=====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 1인칭 복수인 ‘우리’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우리’가 순수한 복수로 저자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Westcott, Kent). (2) 혹자는 ‘우리’가 서간체 복수로 저자 자신만을 의미한다고주장한다(Hewitt, Bruce).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Morris). 왜냐하면다음 절에서 1인칭 단수인 ‘내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도자로서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수신자들에게 부탁하고 있다.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 개역성경에는 ‘가르'(* ,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본문 즉저자가 가지고 있는 ‘선한 양심’이 수신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할 수 있는 근거가 됨을시사한다. ‘더럽혀진 양심’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되므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져야 한다(9:14). 저자가 본절에서 자신의 ‘선한 양심’에 대해 확신하는 것은 자신을 향한 타인의 비방에 대한 방어책으로(Morris, Lane, Hewitt) 저자 자신이 지도자로서 선한 행동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의무를 잘 수행하였음을 시사한다(Bruce).

=====13:19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 – 저자는본절에서 수신자들이 속한 공동체에 다시 방문할 수 있도록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한다.재방문을 위한 기도 요청은 저자와 수신자들간에 개인적으로 상당한 친분 관계가 있었으며(Hewitt, Lane) 또한 저자가 수신자 공동체를 방문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방문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저자의 투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Hewitt, Morris, Bruce). 왜냐하면 23절에서 디모데가 감옥에서 나오면 함께 방문할것이라고 함으로써 자신이 감옥에 투옥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저자가 수신자 공동체에 방문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확실히 있으나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13:20,21

본문은 송영이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 본문은 사 63:11의 ‘백성과 양 무리의 목자를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를 인용한 것이다. 이사야 본문은 모세에 대한 진술이다. 저자는 모세에 대한 진술인 이사야 본문을 인용하여 미디안의 목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 부터 이끌어 낸 모세를 유형론적으로 해석하여 ‘양의 큰 목자’이신 예수께 적용하고 있다(Lane, Bruce). ‘큰’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메간'(* )은 본서에서 예수의 우월성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으며(4:14; 10:21) 모세와 예수의 비교 또한 새 언약의 중재자인 예수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저자의 독특한 논증 방법이었다(1:1-4; 2:1-4; 3:1-6; 8:1-6; 10:26-31;12:18-29). 저자는 예수께 ‘큰 목자’라는 칭호를 부여함으로 사 63:11에서 모세에게칭한 ‘양 무리의 목자’와 대조를 이루게하며 옛 언약의 중재자인 모세보다 새 언약의중재자인 예수께서 더 위대하심을 강조하고 있다.

영원한 언약의 피로 – 본문은 슥 9:11(LXX)의 영향을 받았다. ‘언약의 피’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언약의 희생 제사임을 시사하며(9:20; 출 24:8) ‘영원한’은 예수의 속죄 사역이 영원한 효력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1:8; 5:6,9; 6:20; 9:12,14,15;10:12,14). 예수의 사역과 희생은 영원한 언약을 이루는 근거가 되었으며 이러한 영원한 언약은 새 언약과 동일한것으로 옛 언약올 대신하였다. 본문은 다음에 언급될 예수의 부활과 연결된 것으로, 예수의 부활은 예수께서 자신의 희생으로 이루신 영원한언약을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셨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통해서 영원히 살아계심을 나타낸다(9:20, Morris, Hewitt, Lane).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 본문은 본서 내에서 부활을 직접적으로 언급한유일한 구절이다. 예수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정하고 비준(批准)하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을 통해서 이루어졌다(Michel, Cranfield, Thuren). 한편 ‘이끌어내신’의 헬라어 ‘아나가곤'(* )은 두 언약 즉 옛 언약과 새 언약하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나타낸다.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신 하나님의 간섭은(출 6:7; 20:1,2; 레 19:36; 25:38; 26:13; 신 5:6; 사63:11-14) 죽은자로부터 예수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행위를 예표한다(Lane).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끝어 내심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새로운 언약 즉 영원한 언약을 맺으시는 근거가 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근거가 된다(21절, Cranfield,Thuren).

평강의 하나님이 – 이 칭호는 구약성경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인들이 만든 하나님의 칭호라고 볼 수 있으며(Lane) 하나님께서 평화의 근원이시며수여자이심을 시사한다. 또한 이것은 수신자 공동체 가운데 배교의 위험과 지도자와의불협화음이 있었음을 암시한다(Bruce, Morris, Hewitt). 그래서 저자는 송영에서 수신자 공동체에게 하나님께서 ‘평화의 하나님’이심을 상기시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위해 서로간의 불화를 억제하고 지도자에게 순복하여 평안을 이룰 것을 강조한다(17절, Spicq, Thuren, Morris, Bruce).

모든 선한 일에 너희들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 ‘모든 선한 일에’의 헬라어 ‘엔 판티아가도'(* )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윤리적인 선한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 선한 윤리적인행위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Spicq). (2) 혹자는 선한 일을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한다(살후 2:17, Michel). (3)혹자는 선한 일을 ‘하나님의 선한 선물’로 해석한다(마 7:11; 눅 1:53; 갈 6:6; 약1:17, Lane, Morris).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문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저자는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수신자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은혜로 공급하여 주셔서 온전하게 함으로 하나님 자신의 뜻을 행할수 있도륵 하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본문은 앞서 언급된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와상호 보완적이다. ‘즐거운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며(12:28)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도록(15,16절) 부름을 받은 존재임을 시사한다.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중재자이시며 새 언약 공동체 내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중재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Lane,Morris).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륵 있을지어다 아멘 – ‘그에게’에 대해서 혹자는 문법적으로 ‘하나님’이나 ‘예수’와 모두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둘 다를 가리킬 수 있다고주장하나(Morris)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Bruce).왜냐하면 본문의 송영은 죽은 자로부터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응답이기 때문이다(Lane).

=====13:2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 ‘형제들아’와 ‘용납하라’는 말은 저자가 앞서 기술한 배교나 비그리스도인에대한 격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진술, 그리고 지도자와 수신자들 사이의 갈등에 대한훈계와 비교되어 부드럽고 애정이 서려 있다. 본문에서 저자는 이제까지 진술한 내용을 ‘권면의 말’이라고 정의함으로 자신이 이제까지 진술한 것이 책망보다는 격려차 위로에 기인한 것이었음을 밝히고 다시 한번 본서의 내용에 주목해 줄 것을 암시하고 있다. ‘권면의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로구 테스 파라클레세오스'(* )는 행 13:15에 나오는 표현과 유사한 것으로’설교를’ 지칭한다(Bruce, Morris, Lane). 한편 ‘간단히…썼느니라’가 가리키는 부분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13:18-25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Knox).(2) 혹자는 13장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R. Anderson). (3) 혹자는 본서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rris, bruce, Hewitt, Lane).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썼느니라’의 헬라어 ‘에페스테일라'(* )는 ‘편지를 썼다’라는 의미로 본 서신 전체를 가리키며, ‘간단히 썼다’는 것은유대 문서나 초기 그리스도인 문서에서 공손함을 나타내는 문학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Hewitt, Lane).

=====13: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너희를 보리라 – 저자가 바울의 동역자였던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것은 디모데가 수신자들에게 매우 잘 알려져 서로 교제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놓인 것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렐뤼메논'(* )은 완료 시상으로 이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사역의 임무를 부여받고 보냄을 받은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E.D. Jones). (2) 혹자는 감옥에서 풀려난 것을 가리킨다고주장한다(Hewitt, Lane, Morri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아폴렐뤼메논’이 전자의 견해처럼 사용되었을 경우는 목적어를 동반하나 본절에서는 목적어를 동반하고 있지 않으며, 더욱이 ‘아폴렐뤼메논’이라는 단어는 흔히 감옥에서 풀려나는 경우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Brice, Morris). 그러나 디모데가 언제 어디에 있는 감옥에 갇혔었는지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디모데가 감옥에서 풀려난 사실을 먼저 알고 전하면서 디모데가 속히 올 경우 함께 방문할것을 밝히고 있다.

=====13:24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 저자는 본문에서 앞서 언급한것과 마찬가지로 ‘인도하는 자’와의 문안을 통해서 갈등 관계가 아니라 선한 관계를형성하여 그들에게 순복(順服)할 것을 암시한다(7,17절). 한편 ‘모든 성도’에 대해서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혹자는 본서의 수신자들이 속해 있는 도시 전체의 성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ane). (2) 혹자는 본서의 수신자들이 모이는 가정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uce).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여 화평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화평을 이름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암시적으로 권면하고 있다.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의 헬라어 ‘호이 아포테스 이탈리아스'(* )는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혹자는 당시 이탈리아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 이탈리아 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picq). (2)혹자는 이탈리아 밖에 있는 사람이 이탈리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하거나 이탈리아가 고향인 자들이이탈리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uce). ‘호이 아포 테스 이탈리아스’는 이 두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가 어렵다(Morris, Bruce, Hewitt).

=====13:25

은혜가 너희 모든 사림에게 있을지어다 –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 )는 비록 흔히 사용되던 인사법이라 할지라도 본서를 마감하는 종결 인사로서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저자가 본서에서 계속적으로 하나님께서 구속하시고 인도하시며 도와주시는 은혜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9절; 2:9; 4:16;12:15). 저자는 마지막 인사로 수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킴으로 배교(背敎)의 위험에 처해 있는 수신자들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는 물론 지도자와 수신자들간의 갈등관계를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Lane).

11장과 12장이 믿음과 소망에 대해 다루었다면 본장은 사랑의 실천 면을 다루고 있

다. 본장의 주제는 크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레 19:18;신

6:4,5)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의 모습과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은 자로서

행해야 할 바른 실천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본장을 통해서 하나님을 잃어버린 불신앙과 인간성 상실의 위기에 직면한 이

시대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과 진정한 형제애에 대해 배울 수 있다.이제 본장의 내용

을 이해하기 위해 본장에 나타난 신학적 논의와 구조적 특징 및 당시 성도들의 삶의

정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신학적 논의. 본장에 대한 신학적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본

장이 부록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이요, 또 하나는 본장의 마지막 인사가 바울의 것

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까) 전장까지의 문맥상의 연결을 볼 때, 본장이 부록의 성격을 띠고 있는 본문으

로 간주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본장은 논리상 앞장과의 명백한 연결어가 없이 갑작스럽게 돌입한다. 이로 인

해 본장은 어조와 주제에 있어서 앞장들과 사뭇 다르다.

둘째, 본장은 일반적인 훈계를 말하고 있을 뿐 본서에서 누누이 부각된 저자의 특별

한 관심을 담고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본장은 논리의 일관성과 형식 및 내용에 있어서 부록의 성격을 띠고 있

는 본문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본장은 전장의 28절 내용과 연결되고 있으며, 본서에

서 주로 사용되었던 모세 오경과 시편등의 구약적 어휘를 사용하고 있다(6,11절). 그

러므로 본장은 완전한 본 서신의 일부이다. 더욱이 본장은 교차 대칭 구조를 사용함으

로써 문학적 양식으로 기록된 앞의 장들과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다) 본서의 서두가 서신서의 형식을 갖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본 서신의 서두는

분실되었거나 삭제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주장은 본서를 억

지로 바울 서신의 형식에 꿰맞추려는 태도이다. 마카비서, 바나바서, 클레멘트서, 요

한일서에는 서신체 형식의 서두가 없다. 특히 본장은 앞장에서 볼 수 없는 저자와 독

자의 개인적 관계를 수록하고 있다.만약 본서가 12장이나 본장 17절에서 마감되었다

면, 이것은 편지의 형식이 아닌 논설문이나 단순한 교훈을 실은 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본장을 통해 저자는 주제 전개뿐만 아니라 실제 생활의 적용에도 관심을 표명

하고 있다. 즉 독자들의 신앙의 유익과 실천을 위한 권면과 마지막 인사말로 보아 본

서는 나름대로 서신서의 형식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본장에는 바울의 서신체, 특히 빌립보서에서 두드러진 표현이 부분적으로 나타

난다(16절; 빌 4:18/21절; 빌 4:20/23절; 빌 2:19,23,24). 이렇듯 본장이 전체적으로

바울의 문체 및 사상과 다르면서도 부분적으로 바울의 서신체와 유사한 사실이 결코

본서의 완전성을 의심할 수 있는 요소가 될 수는 없다.

(2) 구조적 특징. 본장에는 사랑의 주제를 언급하는 본문과 교차 대칭 구조를 갖는

본문이 나타나 있다.

(까) 사랑의 주제를 언급하는 본문. 본장은 진정한 이웃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으로 시작한다(1-6절). 이 부분은 성도들에게 당시의 공동체의 삶의 자리를 알게 해

주며 성도들이 사랑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교훈하고

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끊임없이 소유하려고 한다. 그러나 성도는 사랑의 삶을 살도

록 부름받은 자이다. 사랑의 주제를 언급하고 있는 1-6절 내용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

|본 문| 주 요 어 휘 | 내 용 |

+—–+———————————————–+————————+

|1,2절| 필라델피아, 필롸세니아스 | 형제 사랑과 손님대접 |

| | ( , ) | |

+—–+———————————————–+————————+

| | 톤 데스미온, 톤 카투투메논 ( | 갇힌 자와 학대받는 사람|

| 3절 | , ) | 을 생각할 것 |

+—–+———————————————–+————————+

| 4절 | 가모스, 코이테 | 혼인을 귀하게 여길 것 |

| | ( , ) | |

+—–+———————————————–+————————+

|5,6절| 아필라르귀로스, 아르쿠메노이 | 돈을 사랑치 말고 가진 |

| | ( , )| 것으로 만족할 것 |

+—–+———————————————–+————————+

(다) 교차 대칭 구조를 갖는 본문. 10-16절은 구조상 7-9절 및 17-19절과 구별된

다. 10-16절의 구조를 보면, 10-12절은 설명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13-16절은 설명에

근거한 권면이다. 그리고 설명부와 권면부는 전체적으로 교차 대칭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것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 설 명 > < 권 면 >

+—————————+ +—————————–+

| 10 절 | | 13 절 |

+—————————+ +—————————–+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위+—+ +—–+그런즉( ,토이뉜) |

|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 | | |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밖 |

|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 | | | |( ,여소)으로 나아가자 |

|을 권이 없나니 | | | | |

+—————————+ | | +—————————–+

+—————————+ | | +—————————–+

| 11 절 | | | | 14 절 |

+—————————+ | | +—————————–+

|이는( ,가르) 죄를 위 | | | |이는( ,가르) 우리가 여 |

|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 | | |장차 올 것을 찾나니 |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르니| | | | |

|라. | | | | |

+—————————+ | | +—————————–+

+—————————+ | | +—————————–+

| 12 절 | | | | 15, 16 절 |

+—————————+ | | +—————————–+

|그러므로( ,디오) 예수|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

|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 | | |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리자.|

|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 +————–+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

| ,여소) 고난을 받으셨느 | |기를 잊지 말라. |

|니라. | | |

+—————————+ +—————————–+

위의 도표를 보면 설명하는 구절들이 교차 대칭을 이루는 권면의 구절들에게 ‘동기’

를 제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의도적으로 먼저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설명하고, 후에는 성도로서 짊어지고 나가야 할 고난을 제시하고 있다.

(3) 당시 성도들의 삶의 정황. 본서에서 성도들의 삶은 유대교로 인한 배교와 로마

로 인한 박해의 위험을 안고 있었음이 나타난다. 그러나 본장에서는 색다른 삶의 면모

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공동체의 분열과 분쟁과 반목으로 일관된 ‘사랑의 결핍’이다.

1세기말에는 박해로 인해 갇힌 자가 많았으며,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는 유랑자들이

(strangers) 있었다. 또한 당시에는 혼인을 순결하게 여기지 않는 사상들과 안락과 쾌

락만을 일삼는 윤리가 난무했다. 그리고 박해로 인한 궁핍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돈을

사랑하는 풍조가 만연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의 의미를 참되게 알지 못함

으로 인해 지도자와 성도간의 불일치가 존재하였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

고 시종 일관 사랑의 회복과 실천에 대해 피력하고 있다. 본장은 하나님 사랑의 회복

과 이웃 사랑의 실천 및 지도자와의 관계 회복 등이 주요한 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이

다.

한편 본장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즉 1-19절은 사랑의 회복을 다루고

있으며, 20-25절은 마지막 인사와 축도를 다루고 있다.

1. 사랑의 회복(13:1-19)

본문은 나누는 공동체의 상황 아래서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또한 본문은 12:28에서 예배에 대한 주제적 암시를 받았다. 진정

한 예배란 삶의 전영역이 거룩해져야 한다는 확장된 개념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

게 해드리는 삶에 대한 기꺼운 받아들임을 전제한다. 이제 본문에 드러난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 및 지도자와 성도와의 관계에 대해 면밀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1) 이웃 사랑. 판넨베르크(Pannenberg)는 “인간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

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최대 관심은 인간

에게 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을 다루기에 앞서 인간 사랑을 다루는 것은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 하겠다. 저자는 본문을 통하여 우리의 이웃을 위한 열정과 사랑의 냉랭함

으로 시작되는 성도간의 믿음의 붕괴를 경고하고 있다. 본문에 드러난 이웃 사랑의 대

상은 누구인가 ?

(까) 형제 사랑. 성도가 실천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은 형제 사랑이다. 본문

1절에는 ‘계속하라’라는 강한 어조의 명령형이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지

속적인 사랑이다(요 13:1).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한 성도들이 각기 고난 속에서 서

로 격려하고 위로한다면 겹겹이 쌓인 모든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다) 손님 대접. 당시 사회에 있어서는 여행자들이 거처할 숙소가 비위생적이었으

며 숙박 시설의 비용은 엄청나게 비쌌으므로 쉽게 이용할 수 없었다. 이들 중에는 복

음 전파에 일익을 담당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따스한 손길을 요청하는 가난한 나그네

들도 있었다. 우리의 삶에는 개방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집과 교회를 개방하여

도움이 필요한 형제들을 맞아들여 기꺼운 마음으로 대접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

신의 집과 교회를 개방해 놓고 어떤 사람이든 사랑으로 맞이하는 자의 처소를 찾아가

실 것이다(마 25:35-40).

(따) 갇힌 자를 생각함. 초대 교회 당시 감옥에 갇힌 자들은 매우 혹독한 대우를

받았으며, 그들의 음식과 필수품은 아주 형편 없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했다. 박해

의 상황으로 볼 때 복음으로 갇힌 자들은 부지기수였다. 본문은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

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기본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싸우고 있는 수많은 양심수들의 모

습을 기억하게 해준다. 아직도 이 땅에는 자신의 생애를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수많은

양심수들이 갇혀 있다. 우리는 부당하게 투옥된 모든 사람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

도를 증거했다는 이유로 고난받는 우리의 형제들에 대하여 항상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또한 그들의 자유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마) 순결과 자족. 본문은 거룩의 속성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에게 비추어 볼 때

위배되는 비윤리성을 고발한다. 그것은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는 결혼의 가치성의

몰락과 돈을 사랑하는 물질주의이다.

(a) 결혼의 순결성. 결혼이란 도덕적 순결과 서로에 대한 영원한 책임성을 전제

로 한다. ‘혼인을 귀히 여기라'(4절)는 말은 ‘결혼을 값지게 하라'(RSV) 또는 ‘하나님

의 창조 질서에 걸맞게 결혼 생활을 하라’는 의미이다. 당시에 금욕주의자들은 결혼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천시하였으며, 반면에 쾌락주의자들은 자유로운 성생활을 권장하였

다. 이에 저자는 혼인을 귀히 여길 것과 아울러 결혼의 가치를 무너뜨리는 ‘음행'(

,포르노스)과 ‘간음'( ,모이코스)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음행

은 무절제한 성생활을 뜻함이요, 간음은 정상적인 부부 관계를 파괴하는 행위를 말한

다.

우리 사회에는 점차 프리 섹스(free sex)와 동성 연애, 미혼모, 에이즈(AIDS), 증가

하는 이혼률 등 다양한 성범죄들이 쌓여가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사회 질서뿐 아니라

가정의 파괴등으로 인간을 해롭게 하고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 질서를 역행하는

이 모든 것을 철저히 심판하실 것이다(창 19:4-28; 고전 6:9,10; 벧후 2:14).

(b) 자족(自足). 돈에 대한 탐욕과 성적 방종은 상호 연관이 있다(고전

5:10ff.). 바울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 6:10)고 한 점은 이

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 지나친 부(富)는 종종 육욕의 유혹에 쉽게 빠지게 한다. 여기

서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소망을 둔다는 것을 뜻한다. 성도는 결코 자

기 자신으로 인해 만족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바울은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6)라고 하였으며, 또한

그는 감옥 안에서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빌 4:11)라고 말하

였다. 그는 결코 자기 자신으로 인해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서 허락하신 ‘육체의 가시’마저 감사하게 여겼다(고후 12:7).

주는 어떤 분이신가 ?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

게 어찌히리요'(6절). 저자는 하나님께서 야곱(창 28:15)과 여호수아(수 1:5)에게 주

신 신변 보장의 약속의 말씀뿐 아니라, 고민에 빠져 있던 시편 기자가 마침내 찾게 된

평안에 대해서도 독자들이 상기하도록 서술하고 있다(시 118:6). 성도는 자신에게 가

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거할 때에 비로소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다(6절).

(2) 하나님 사랑. 십자가의 사랑은 왜(Why), 어디에서(Where), 어떻게(How) 일어났

는가 ? 그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도록 요청하고 있는가 ?

(까) 거룩케 함. 유대인의 속죄일에는 대제사장이 수송아지를 잡아 그 피는 지성

소로 가지고 들어가고 제물은 영문 밖에서 불태웠다(레 16:14,15,27). 이 같은 제사를

통해 대제사장의 죄와 백성의 죄는 속죄받았다. 이와 같이 예수도 백성을 거룩케 하시

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

당시의 유대인 성도들은 유대교적인 예배와 희생 제물을 바치는 제사, 이스라엘 백

성만이 누리는 선민으로서의 특권, 율법적 요소 등을 여전히 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은 자기 백성이 진정한 성화를 얻는데 있다. 성도

의 거룩케 됨은 죄로부터의 자유와 모든 얽매임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또한 성도들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거룩의 참의미를 실현하시길 원하신다.

(다) 진정한 예배.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것을 믿었으므로 성문 밖에서 죽

으셨다. ‘장차 올 영구한 도성'(14절)이 없는 고난은 절망 그 자체이다. 이 도성은 그

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한 자에게 소유된다. 부활의 경험은 예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

이며(빌 3:10), 그와 더불어 고난을 나누는 것은 생활 가운데서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것이다(벧전 4:13,14).

‘성문 밖'(12절)의 개념은 무엇인가 ? 이것은 ‘구원의 새로운 장소’를 뜻한다. 구약

시대에 성전은 예배의 장소로서만이 아니라 구원의 중심지로도 이해되었다. 대제사장

은 지성소에 들어가 수양과 수염소의 피를 뿌리고 그 다음에 살아있는 염소를 취하여

그 위에 안수하고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짊어지게 해서 광야로 내보냈다(레 16:1 ff.).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장소는 중심에서 ‘주변으로’이동되어졌다.

예수는 추방당하고 버림받은 자들과 함께 광야와 같은 곳에서 죽으셨다. 추하고 불결

한 땅은 예수로 말미암아 거룩한 땅이 되었다. 구원이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실천적 면을 내포한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유대교의 선민 사상과 같은 사적 소유나 개인적 특권으로 해석해 왔

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배타적 공동체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것은 그가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죽으신 그곳으로 따라 나서는 것을 포함한다.

즉 그것은 당신의 백성을 위해 고난당하신 예수가 있는 그곳에 나의 삶을 헌신하는 것

이다.

따라서 진정한 예배란 첫째는, 성문 밖에서 고난당하신 예수로 말미암은 감사의 찬

미를 드리는 일이요(15절), 둘째는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 나눔과 섬김의 삶

을 사는 것이다(13,16절).

(3) 지도자와 성도의 관계. 지도자와 성도의 관계의 깨어짐은 지도자와 성도간의 분

리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분리를 초래하며, 이것은 공동체의 깨어짐을 초래한다. 이

에 대해 통분히 여긴 저자는 본문에서(7,17-19절) 지도자와 성도의 관계에 대해 강조

하고 있다.

(까) 모범적인 지도자상. 본문은 모범적인 지도자상에 대해 네 가지로 말하고 있

다.

첫째, 교회의 지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되 그 행실은 모범적이어야 한다(7

절).

둘째, 지도자는 성도들의 영혼을 ‘경성하여 지키는'( ,아그뤼프네

오) 사람들이다(17절). 이 ‘아그뤼프네오’라는 단어는 ‘잠’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의미

는 타인의 생명을 구원하고 지키기 위해 늘 깨어 있음을 뜻한다.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도시에서 파수병으로 근무하는 병사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 안에 일어난 분열과 분쟁으로부터 성도들을 지키기 위해 경성하고 있

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내 양떼를 치라'(요 21:17)는 명령에 잠시도 졸지 않았던

성실한 지도자들이었다.

셋째, 지도자는 즐거움으로 일해야 한다(17절). 이는 위로부터의 권위를 힘입었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즐거움은 현세의 만족에 근거하지 않는다. 지도자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소명(召命)아래서 삶을 영위하므로 사람에게서 전적으로 자유하다. 그러나

그 자유에는 제한이 있다. 그 제한은 섬김이다. 비록 지도자는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

하나, 그는 모든 사람들의 종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섬김 가운데서 다른 사람을 위

한 자유를 생각해야 한다.

넷째, 지도자는 성도들의 기도에 의지한다(18,19절). 지도자는 만능인으로서 행세하

려고 완전을 보이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성도에게 기도를 요청하는

자이다.

(다) 성도의 자세. 위에서 제시된 모범적인 지도자상에 대한 성도의 자세는 기억

하고(7절), 순종하며(17절), 문안하는 것이다(24절). 지도자는 그 자신을 위해 존재할

수 없다. 지도자는 성도들을 위하여 존재하며, 성도들은 그 지도자를 순종해야 한다.

또한 지도자는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는 경건의 훈련과 더불어 다양한 각도에서의 진지

한 연구를 거듭하여 성도들을 일깨워야 한다. 성도들에 대한 제자 훈련과 양육이 온전

하게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더 역동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실

현하실 것이다. 성도는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하며 그들의 위로부터의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

* ‘성문 밖’에 대하여. 예수가 성문 밖에서 죽었다(12절)는 사실은 선교에 관한 보

다 완전한 이해를 제공한다. 교회의 선교는 안으로 불러모으는 차원뿐만 아니라 더 넓

은 세계로 흩어져야 한는 적극적 선교의 차원을 갖는다.

교회는 ‘사도직’을 수행함으로써 자기의 존재를 확인한다. ‘사도직’은 하나님 나라

와 세계를 연결하는 기본 개념이다. 따라서 선교는 그의 구속된 백성과 관계하며 그들

을 세상으로 보내어 일하게 하는 데 관계한다(눅 10:1). 본 주제강해에서는 ‘성문 밖’

의 성경적 관점가 선교의 목표 및 선교의 방향과 대안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성문 밖’의 성경적 관점. 이에 대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으로 나누어서 살펴보

자.

(까) 구약성경.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은 세계의 중심이었으며(겔 5:5), 어느

민족이든 구원을 위해서는 시온의 거룩한 산으로 와야 했다(시 6:2; 미 4:1 ff.). 북

왕국과, 뭇 민족들의 포로가 된 후에도 유다는 이러한 자의식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

은 거룩한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바벧론에서도 그들의 종말론적 비전을 생생하게 간직

하였다. 때가 되자 몇몇 지도자들은 귀향하여 성전을 재건하였다. 포로가 되어 남아

있는 사람들은 유배지에서 생활하면서도 해마다 예루살렘에로의 순례를 시도하였다.

따라서 구약 시대의 선교는 기본적으로 ‘변방에서 중심으로’이동하는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다) 신약성경. 신약성경에서 예수의 죽음은 선교의 본질을 명백히 보여준다. 선

교는 더 이상 ‘오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이다. 저자는 본장을 통해서 이렇게 말한

다.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凌辱)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로 나아가자”(13절). 선

교의 초점은 영원한 국외자(Outsider)로 자신을 동일화시킨 예수 위에 놓여져야 한다.

선교는 우리의 안락하고 화려한 성안의 장벽과 문을 뚫고 세상을 위해 ‘그가 당하신

능욕’을 어깨에 메고 그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교회의 건축과 성장은 ‘약속의 땅에서도 외방에 있는 것처럼'(11:9) 천막에 잠시 머

물러 살았던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잠시 머물러 있는 공동체의 의미를 갖는다. 교회

는 고립된 요새나 성곽이 아니라 잠정적 거주지요, 광야의 천막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성문 밖에’현존하시는 예수께 나아가 임시 체류자로서의 삶을 살 때

비로소 하나님께 참된 찬양의 제사를 올릴 수 있다. 그 삶이란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

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신'(2:17)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랑과 신실함을

구현하는 삶이다. 이런 삶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자신까지도 기꺼이 희생하는

‘능욕윽 지는'(13절)삶의 자세가 요청된다. 이러한 삶이 바로 거룩한 것이라 할 수 있

다.

(2) 선교의 목표. 선교는 성문 밖으로 나아가 십자가에서 처형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바라보게 된 ‘장차 올 영구한 도성'(14절)을 목표로 한다. 죄와 악의 세계,

고난과 불의의 세계는 영원한 도성이 될 수 없다. 그 속에서 행하는 우리의 나눔과 섬

김의 실천은 도성을 향해가는 통로에 불과하다.

새 예루살렘에 대한 꿈이 없는 선교는 좌절에 이르고 만다. 그것은 순환성과 일회성

에 끝나버리고 미래 앞에서 무능력하게 된다. 예수의 죽음은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으

로 하여금 죄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우리는 자유로

운 세계를 바라보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로와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일해야 한다.

(3) 선교의 방향과 대안. 성도는 편안하고 안락한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문 밖에

서 십자가에 고난당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증언하는 사도적 대리인이 되어야 한다.

성도는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구원의 은총을 개인적 소유로서만 간직하지 말고

주변의 이웃들에게 증거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다른 사람을 위해 생명을 내줄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을 태세를 갖추고 있을 때에 참된 교회로서 존재할 수 있다.

2. 마지막 인사와 축도(13:20-25)

이제 저자는 본서의 독자들에게 간략한 몇 가지 사항을 권명함으로써 본서를 마무리

짓는다. 이 마지막 권면에는 앞에서 밝힌 모든 내용을 총괄한 뛰어난 목회적 교훈이

나온다.

본문은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마지막으로 나타내면서 성도들을 축복 기도하고

있으며(20,21절), 다음은 성도들이 소중히 여겨야 할 성도간의 교제와 은혜를 언급함

으로써 본서의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22-25절).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과 형제

들과의 교제에 초점을 맞추어 보기로 하자.

(1) 하나님의 속성. 마지막 권면 속에서 저자가 언급한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인가 ?

(까) 평강의 하나님. 하나님만이 참된 평강의 원천이 되신다. 본서의 독자들은 하

나님을 떠나 인간적인 차원에서 평강을 얻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본문은 하나님 자신

에게만 참된 평강이 있으며,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쾌락과 안일은 괴로움일뿐임을 교

훈한다.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분리되었던 관계를 예수의 피흘리심을 통해 화해시키는

사랑의 행위자이시며 ‘평강의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은혜를 받은 성도가 항상 기억해

야 할 것은 그러한 평강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능욕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 저자가 축도한 내용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실현되

기를 소원하는 기도문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선한 일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해 갖고 계서서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말한다(빌 1:6; 2:13).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혼자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온전케 된 자와 함께 일하신다. 그래서 저

자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온전케 하시기를 기도하였다(21절). ‘온전케 하다'(

, 카타르티조)라는 말은 ‘충분하게 공급하다’, ‘부서지고 찢어진 것을

수선하다’, ‘조절하다’, ‘구비하게 하다’등의 의미이다. 이는 성도들의 삶이 하나님으

로 인하여 부족함이 없게 되기를 기도한 내용이다. 결국 성도의 삶 전체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뜻이 이 땅 위에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방편이어야 한다.

(2) 형제들과의 교제. 저자는 이제까지 독자들에게 책망과 격렬한 어투로 충고한 것

이 사사로운 감정이 아닌 그들의 신앙 성숙을 위한 권면이므로 시비없이 받아들여 주

기를 바란다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한다. 이어서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디모데가 놓였다

는 것과 이달리야에서 온 자의 문안 소식을 새롭게 전해주고 있다(23,24절). 디모데가 놓였다 함은 그가 옥살이에서 풀려났다고 해석함이 옳다. 이것으로 인해 그 당시에는 갇힌 자가 많았을 것을 추측케 해준다(3절).

그밖에 본문에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에게 문안하라는 권면도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저자가 디모데와 자기 자신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 또 그들에게 문안하고 싶어하는 이달리야인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는 이유는 그만큼 성도의 교제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에 대해 나타내주기 위해서이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은혜가 모두에게 있기를 바랐다(25절). 이러한 축도는 신약성경 서신서의 말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상례적인 문구이다(딛 3:15).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은 목회자로서 사랑하는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마지막으로 호소할 수 있었던 뜨겁고도 간절한 축복의 기도였다.

매튜헨리주석1145-히브리서 13장

히브리서 13장

Ⅰ. 몇가지 권고 13:1-17

사도는 믿는 히브리인들에게 여러 가지 선한 의무들을 행할 것을 권고 한다.

1. 형제 사랑을 행할 것을 권고함(1)

기독교의 정신은 사랑이다. 또한 믿음도 사랑에 의하여 역사한다. 진정한 믿음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이웃사랑의 고리이다. 이런 형제의 사랑이 그 사랑을 가장 필요로하는 핍박의 때에 오히려 상실될 위험에 처해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어느 때나 항상 서로를 형제처럼 사랑해야 한다. 또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이 자랄수록 형제간의 사랑도 더욱 성장해야 할 것이다.

2. 나그네 대접하기를 권고함(2)

마지못해서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의 사랑과 봉사의 정신을 발휘해야만 한다. 그 의무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이다’ 나그네들이 거처할 곳이 없음을 보았을 때 우리에게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거든 기꺼이 우리의 마음과 집을 비워서 그들이 거기에 기거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런 의무를 행하는 동기는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후히 대접하는 종들에게는 그들이 다 기억하지 못하는 부지중의 일에까지도 은혜와 영예를 내려 주신다.

3. 동정심을 발휘할 것을 권함(3)

1) 이 일에 대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 자유로운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갇혀 있거나 학대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하여 마치 자신들도 그들과 같은 족쇠에 묶여 있는 것처럼 동정심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2)이런 의무를 수행해야만 하는 이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이는 그들과 또 같은 육신의 몸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신비한 몸, 즉 같은 그리스도의 지체에 속하였기 때문에 서로의 짐을 분담하는 것이 당연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 몸에서 떠나는 것이 된다.

4. 순결하고 정숙할 것을 권함(4)

혼인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임을 상기하여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 사람이 혼인을 순결하고 정숙하게 유지하고 더럽히지 않을 때 그 혼인은 귀하고 복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더럽힌 부정한 행위에 대한 심판은 두려운 것이다.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라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죄를 애정이나 연모로 보시지 않으시고 음행과 간음으로 간주하여 거기에 상응하는 책벌을 가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유죄를 선고하시고 처벌하실 것이다.

5. 자족할 것을 권고함(5,6)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은혜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는 죄가 바로 탐욕이다. 우리는 이 죄를 자제하려 노력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서 이 죄를 근본부터 척결하도록 해야 한다. 탐욕과 상반되는 것은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고’ 기뻐하며 만족해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날 그날 우리에게 주시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우리는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여건을 호전시켜 주셔도 그 환경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은 그 환경보다 더욱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바울은 비록 가진 것도 없고 천한 위치에 처해 있었지만 ‘어떠한 상태에 처하더라도 자족하는 것을 배웠노라’고 말하였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포괄적인 약속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도우심을 확인하게 된다(6절). 인간들은 하나님을 해하는 어떤 행위도 할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백성을 해하려 하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백성을 해하려 하는 행위를 자기 백성의 유익으로 변경시킬 수 있으시다.

6.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사역자들에게 행하여야 할 의무를 권고함(7-17)

죽은 사역자들과 아직 살아있는 사역자들 모두에게 행하여야 할 의무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1〕죽은 사역자 대한 의무(7절)

1) 이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이들은 전에 그들을 치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던 사람들이었다.

2) 이들에 대해서 행하여야 할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 ‘저들을 기억하라’ 그리고 ‘믿음을 본받으라’ 즉 그들이 살아서나 죽을 때나 지키고 의지하던 믿음의 은혜를 본받도록 노력하라. 또한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라.’ 이제 사도는 전에 그들이 가르침받았던 그 진실한 믿음을 따라야 할 것을 그들에게 말하며 더 나아가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심과 불변하심을 언급하는 데 이르고 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항상 살아 계시며 항상 변함이 없으시다. 따라서 그들도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믿는 일에 흔들리지 말고 굳게 서야만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도는 그들에게 빠져서는 않될 잘못된 교훈들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다.

① 이러한 잘못된 교훈들은 여러 가지이며 다양하다(9절). 이것들은 전에 그들이 받았던 교훈과는 전혀 다르며 그들 자체로서도 서로 모순되는 교훈이다.

② 이러한 교훈들은 교회에서 들어보지 못한 전혀 생소한 것이다.

③ 이러한 잘못된 교훈들은 교회에서 들어보지 못한 전혀 생소한 것이다.

④ 이 잘못된 교훈들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 등 외적이고 사소하며 없어질 것들이다.

⑤ 이 잘못된 교훈들은 어떠한 식으로도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그것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신령하게도, 겸손하게도, 감사하게도 못할 뿐만 아니라 물론 하늘에 이르게도 못한다.

⑥ 이러한 잘못된 교훈을 받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제단의 특권을 박탈당한다(10절).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리스도 교회에는 제단이 있다. 이 제단은 물질적인 제단이 아니라 인격적인 제단이며 곧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제단인 동시에 우리의 희생 제물이시다. 이 제단은 진정으로 믿는 자들에게 만찬을 제공해 준다. 주의 성만찬은 복음 시대의 유월절 만찬이시다. 구약의 장막이나 레위기 속의 율법을 고집하거나, 그리고 돌아가는 자는 이 그리스도의 제단의 특권에서 제외된다. 사도는 이 논지에 대한 주장을 먼저 증명한 후 더욱 발전시킨다.

㉠ 유대의 의식을 집요하게 고집하는 것은 복음 시대의 제단의 특권을 받는데 장애가 된다. 복음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결실이다. 그러므로 이 희생의 의미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잔치에 참여할 권리가 없다.

㉡ 그는 이 논지를 더욱 발전시킨다(13-15절).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가자(31절).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능욕을 감수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같이 하여야 하는 더 큰 이유는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다’는 사실에 있다. 즉 이 세상에서 우리는 잠시 후 죽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서 이 세상이 우리에 줄 수 없는 안식과 안착을 구하여야 한다(14절). 그러므로 이 일에 필요한 복음의 제단을 바르게 사용하자. 즉 우리의 희생 제물들을 이 제단에 가져오자(15,16절). 첫째, 우리가 항상 하나님께 바쳐야만 하는 찬미의 제물을 가져오자. 이 속에는 감사와 찬미와 기도가 포함되어 있다. 그것들은 ‘우리 입술의 열매’들인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자선과 사랑의 제물을 가져오자(16절). 우리는 단순히 입술로 즉 말로만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선행의 제물로 제사를 드려야 한다.

〔2〕살아있는 사역자에 대한 의무(17절) : 이것은 그들에게 순종하고 또한 그들의 가르침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역자들의 가르침에 복종해야 하며 자기들이 아주 현명하고 선하고 위대한 존재라는 망상을 버리고 겸손히 사역자들에게서 배우며 그들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런 의무를 져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사역자들은 교인을 다스리는 자들로서 그들의 직분에는 그렇 수 있는 참된 권위가 있기 때문이다. (2) 사역자들은 교인들의 영혼을 돌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인들을 해치려는 모든 것으로부터 교인들을 보호한다. 또 교인들의 영혼을 하늘나라에 가게 하는 모든 기회를 선용하고자 애쓴다. (3) 사역자들은 교인들이 어떻게 그들의 의무를 감당해야 할 지를 지도해 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한 지도를 베풀기를 기뻐한다. 만일 사역자들이 교인들의 충성과 성공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역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못하는 슬픔에 빠진다면 그것은 사역자들의 손실일 뿐만 아니라 교인들의 손실이 될 것이다.

#1-6 The design of Christ in giving himself for us, is, that he may purchase to himself a peculiar people, zealous of good works; and true religion is the strongest bond of friendship.

Here are earnest exhortations to several Christian duties, especially contentment.

The sin opposed to this grace and duty is covetousness, an over-eager desire for the wealth of this world, with envy of those who have more than ourselves.

Having treasures in heaven, we may be content with mean things here.

Those who cannot be so, would not be content though God raised their condition.

Adam was in paradise, yet not contented; some angels in heaven were not contented; but the apostle Paul, though abased and empty, had learned in every state, in any state, to be content.

Christians have reason to be contented with their present lot.

This promise contains the sum and substance of all the promises; “I will never, no, never leave thee, no, never forsake thee.

In the original there are no less than five negatives put together, to confirm the promise: the true believer shall have the gracious presence of God with him, in life, at death, and for ever.

Men can do nothing against God, and God can make all that men do against his people, to turn to their good.

#7-15 The instructions and examples of ministers, who honourably and comfortably closed their testimony, should be particularly remembered by survivors.

And though their ministers were some dead, others dying, yet the great Head and High Priest of the church, the Bishop of their souls, ever lives, and is ever the same.

Christ is the same in the Old Testament day.

as in the gospel day, and will be so to his people for ever, equally merciful, powerful, and all-sufficient.

Still he fills the hungry, encourages the trembling, and welcomes repenting sinners: still he rejects the proud and self-righteous, abhors mere profession, and teaches all whom he saves, to love righteousness, and to hate iniquity.

Believers should seek to have their hearts established in simple dependence on free grace, by the Holy Spirit, which would comfort their hearts, and render them proof against delusion.

Christ is both our Altar and our Sacrifice; he sanctifies the gift.

The Lord’s supper is the feast of the gospel passover.

Having showed that keeping to the Levitical law would, according to its own rules, keep men from the Christian altar, the apostle adds, Let us go forth therefore unto him without the camp; go forth from the ceremonial law, from sin, from the world, and from ourselves.

Living by faith in Christ, set apart to God through his blood, let us willingly separate from this evil world.

Sin, sinners, nor death, will not suffer us to continue long here; therefore let us go forth now by faith and seek in Christ the rest and peace which this world cannot afford us.

Let us bring our sacrifices to this altar, and to this our High Priest, and offer them up by him.

The sacrifice of praise to God, we should offer always.

In this are worship and prayer, as well as thanksgiving.

Ⅱ. 결 론 13:18-25

〔1〕사도는 믿는 유대인들에게 자신과 더불어 고난을 당하는 사역자들을 위하여 기도를 하여 달라고 당부하고 있다(18절).

1) 자기들의 사역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믿는 사람들이 당연히 수행해야 할 의무 중 하나이다. 사역자들은 자기 교인들의 기도를 필요로 한다. 교인들이 자기의 사역자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면 할수록 교인들은 그들의 사역으로부터 더 큰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2) 교인들이 자기들의 사역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데 대한 정당한 이유들이 제시되어 있다.

①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 하노라(18절). 많은 유대인들이 바울에 대하여 악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정당함을 표명하고 있다. ‘우리가 확신 하노니’라는 말 대신 바울은 ‘우리가 아노니’라고 말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겸손하게 말하고자 하였다. “우리가 (나와 및 여러 그리스도의 일군들) 모든 일에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우리가 모든 일에 정직하고 성실하게 행하려 하노라.” 선한 양심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신자의 모든 의무를 존중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라 해도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② 바울이 그들에게 기도를 요청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19절). 그것은 현재 그가 그들과는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그들에게 다시 돌아갈 수 있기를 참으로 바라고 있었으며 그들의 기도를 그것을 이루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2〕사도는 그들을 위하여 ‘평강의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다(20절). 사도는 여기서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그가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 화해와 평강의 길을 하나님으로부터 배우고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사역에 대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셨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낸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수 있는 강력한 것이다. 그리스도께 붙여진 칭호는 양의 큰 목자시오 우리의 구세주며 통치자인 주 예수라는 명칭이다. 믿는 자들은 그의 목장의 양떼들이며 그의 관심과 보살핌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화해하실 수 있게 하며 또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게 했던 수단과 방법은 ‘영원한 언약의 피를 통하여’서 였다. 이 피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서 이루어진 언약을 성별하고 봉인하는 표시인 것이다. 사도는 그들을 위하여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라고 기도하고 있다(21절). ‘모든 선한 일에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은 성도 자신들이 원하는 바일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간구되고 있는 위대한 일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앞에 즐거운 것을 항상 그들속에 이루심으로써 그의 백성을 온전케 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이런 일에 대하여 ‘아멘’하고 화답해야 한다.

〔3〕사도는 디모데와 더불어 히브리 교인들을 보고 싶다고 말한다(23절).

〔4〕사도는 인사말과 비록 짧지만 엄숙한 축도로 본 서신을 맺고 있다(22절).

1) 작별 인사를 모든 믿는 히브리인들과 그들을 인도하는 사역자들에게 전하고 있으며 또한 이달리아에서 온 성도들에게도 문안하고 있다.

2) 짧지만 엄숙한 축도를 하고 있다(25절).

#16-21 We must, according to our power, give to the necessities of the souls and bodies of men: God will accept these offerings with pleasure, and will accept and bless the offerers through Christ.

The apostle then states what is their duty to living ministers; to obey and submit to them, so far as is agreeable to the mind and will of God, made known in his word.

Christians must not think themselves too wise, too good, or too great, to learn.

The people must search the Scriptures, and so far as the ministers teach according to that rule, they ought to receive their instructions as the word of God, which works in those that believe.

It is the interest of hearers, that the account their ministers give of them may be with joy, and not with grief.

Faithful ministers deliver their own souls, but the ruin of a fruitless and faithless people will be upon their own heads.

The more earnestly the people pray for their ministers, the more benefit they may expect from their ministry.

A good conscience has respect to all God’s commands, and all our duty.

Those who have this good conscience, yet need the prayers of others.

When ministers come to a people who pray for them, they come with greater satisfaction to themselves, and success to the people.

We should seek all our mercies by prayer.

God is the God of peace, fully reconciled to believers; who has made a way for peace and reconciliation between himself and sinners, and who loves peace on earth, especially in his churches.

He is the Author of spiritual peace in the hearts and consciences of his people.

How firm a covenant is that which has its foundation in the blood of the Son of God! The perfecting of the saints in every good work, is the great thing desired by them, and for them; and that they may at length be fitted for the employment and happiness of heaven.

There is no good thing wrought in us, but it is the work of God.

And no good thing is wrought in us by God, but through Christ, for his sake and by his Spirit.

#22-25 So bad are men, and even believers, through the remainders of their corruption, that when the most important, comfortable doctrine is delivered to them for their own good, and that with the most convincing evidence, there is need of earnest entreaty and exhortation that they would bear it, and not fall out with it, neglect it, or reject it.

It is good to have the law of holy love and kindness written in the hearts of Christians, one towards another.

Religion teaches men true civility and good breeding.

It is not ill-tempered or uncourteous.

Let the favour of God be toward you, and his grace continually working in you, and with you, bringing forth the fruits of holiness, as the first-fruits of glory.

[히브리서 13장 강해설교말씀] 예수님은 사랑의 완성(히 13: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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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히브리서 13장 강해설교말씀 중에서 예수님은 사랑의 완성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선택받은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에서 살아났습니다. 너희는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아담의 혈통으로 나온 자는 모두 죽었습니다. 이런 자를 살려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목: “예수님은 사랑의 완성” (히 13장)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히 13:1~25

요절: “그러므로 예수님도 자신의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히 13:12~13)

주제: 예수님은 사랑의 완성자로 자신의 몸을 희생하셨다. 사랑의 왕이시다.

이번 주일은 한국전쟁(Korean War, 1950년 6월 25일~1953년 7월 27일, 3년 1개월 2일간) 발발(6.25)을 회상하며 나라와 민족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주일입니다. 이 전쟁은 휴전협정으로 되어 있어 지금도 종전이 아니라 휴전인 전쟁 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준전시 상황으로 67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군이 연합군에 항복 서명함으로 일제 강점기 36년이 끝나고 해방되자 남한은 미군정으로 자유민주주의, 북한은 소련의 영향으로 공산주의 체제로 들어갔습니다. 북한은 3년 동안 치밀한 전쟁준비를 하여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4시에 암호명 ‘폭풍 224’이었는데, 남조선 해방의 명목으로 대한민국에 선전포고 없이 기습 침공하여 38선 전 지역에서 남침하였습니다. 북한 인민군이 24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해 온 것이 그 시작입니다. 마침 주말 휴가로 많은 대한민국 군인들이 전선을 비운 사이에 남한으로 공격하여 3일 만에 서울 미아리고개 전선이 뚫리고 서울이 함락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미국 트루만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의 간청으로 참전을 결정하였고 유엔 안보리 이사회에서 9:1로 유엔군 참전을 결의하여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인천 상륙을 9월 15일 지휘함으로 16개 나라가 군대를 지원하여 대한민국 수호를 위해 싸워주었습니다. 고마운 나라들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들 16개 나라에 가서 교육선교를 하였습니다. 9월 28일에 3개월 만에 서울이 수복되어 시청에 태극기가 게양되었습니다. 1951년 1월 중공은 조선족을 중심한 인민군을 파병함으로 1.4 후퇴가 되어 동부전선은 고성까지, 서부전선은 강화까지 국경이 형성되어 155마일 오늘날 휴전선이 생겼습니다.

한국 전쟁은 근대 국제 체제가 형성된 1500년부터 현재까지 발생한 전쟁 가운데 군인 사망자가 일곱 번째로 많았던 전쟁입니다. 한국군 사망자 13만 8천 여명, 부상자 45만여 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하면 60만 9천여 명, 북한군 사망자와 부상자 52만여 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 80만 명, 유엔군 사망자 5만 8천여 명, 부상자 48만여 명, 실종자와 포로까지 포함하면 총 54만 6천여 명, 중공군 사망자 13만 6천여 명, 부상자 20만 8천여 명, 실종자와 포로, 비전투 사상자까지 모두 포함 97만 3천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미군 사망자는 3만 3천686명, 영국군 1천78명, 터키군 966명, 캐나다군 516명 순으로 사망자가 많고, 유엔군 실종자와 포로는 각각 3,950명, 5,817명이며 부상자는 10만 3,460명입니다. 남한 민간인 사망자 24만 5천여 명, 학살된 민간인 13만여 명, 부상 23만 명, 납치 8만 5천여 명, 행방불명 30만 3천여 명으로 모두 100만여 명의 남한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1953년 북한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북한 민간인 사망자는 28만 2천명, 실종자 79만 6천 명입니다. 당시 남북한 전체 인구의 1/5이 피해를 입었던 비참한 전쟁이었습니다.

박두진 작사, 김동진 작곡의 6.25노래가 1951년부터 불려 왔습니다.

1절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후렴)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2절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불의의 역도들을 멧도적 오랑캐를

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어 흘려온 값진 피의 원한을 풀으리

3절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

자유를 위하여서 싸우고 또 싸워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게 하리

이제 다시는 이런 전쟁이 우리나라에 없도록 남과 북이 평화롭게 통일이 되어 세계를 주도해 나가는 한국이 되도록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시다.

일제 강점기 때 평양신학교 채플에서 즐겨 불렀던 찬송이 70장(통 79장)이 오늘도 부르면 좋겠습니다. 마틴 루터가 좋아한 시편 46편을 기초로 쓴 가사.

1.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오라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 위에 넘치되 두렵잖네

2. 이 방이 떠들고 나라를 모여서 진동하나

우리 주 목소리 한 번만 발하면 천하에 모든 것 망하겠네

3. 만유 주 하나님 우리를 도우니 피난처요

세상의 난리를 그치게 하시니 세상의 창검이 쓸데없네

4. 높으신 하나님 우리를 구하니 할렐루야

괴롬이 심하고 환난이 극하나 피난처 되시는 주 하나님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 히브리서 마지막 장인 13장을 강해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의 완성”이심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전체가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소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 대해 복음을 20여 년간 해 왔으나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 9:3)라고 표현할 만큼 강렬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동족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 무궁한 대제사장, 멜기세덱, 새 언약의 중보자, 천국의 기업, 믿음의 완성, 소망의 완성, 사랑의 완성이심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시다. 형제 사랑을 실천하라(히 13:1~6)

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3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4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잠자리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그러나 음행 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분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님은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1절에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에서 형제 사랑(필라델피아 philadelphia, brotherly love)는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의 내용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 사도 베드로도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라고 가르쳤습니다(벧전 1:22). 사랑의 성격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 13장이 잘 증거하고 있습니다. 형제 사랑은 단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 선행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말합니다(요일 3:17-18).

2절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형제 사랑은 구체적으로 손님 대접의 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창세기 18장과 19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은 천사인줄을 알지 못하고 손님을 잘 대접했습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세 손님들에게 ‘달려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2절), ‘급히 장막에 들어가’ (6절), ‘속히…떡을 만들라’(6절), ‘짐승 떼에 달려가서’(7절), ‘급히 요리한지라’(7절) 등의 표현을 보면, 그는 손님을 영접할 때 겸손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또 정성껏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손님 대접이나 선행은 참된 경건과 신앙의 증거입니다. 딤전 3:2에서 바울은 장로의 자격으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돈은 선한 일을 위해 쓰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돈을 잘 쓰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훈하기를, 부자들에게 마음을 높이거나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딤전 6:17-18). 잠 11:24-25는 말하기를,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고 합니다.

3절 “너희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형제 사랑은 옥에 갇힌 자나 학대받는 자를 돌아보는 행위로도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앙과 염소의 비유에서, 형제들 중 작은 한 사람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감옥에 갇혔을 때 방문한 자의 행위가 곧 주님께 한 행위라고 말씀하십니다(마 25:35-40).

4절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잠자리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그러나 음행 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부부의 관계는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관계입니다. 결혼이나 부부의 관계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을 때부터 주셨던 아름다운 관계, 즉 인간이 범죄 하기 전부터 가졌던 귀하고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위하는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잠 5:18-19는, 아내를 사랑스러운 암사슴과 아름다운 암노루에 비유하였고 남편은 그 아내의 품을 항상 만족하게 여기고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고 가르칩니다. 남편이든 아내이든 간에 간음이나 음행은 부부 사랑에 반대입니다. 그러려면 결혼한 성도는 이성 관계에 대해 매우 조심하여 처신해야 하며, 술이나 춤 혹은 인터넷 채팅 등 중독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부부는 마귀의 시험이 틈타지 못하도록 서로를 지켜주어야 합니다.

5-6절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분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님은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오? 하노라” 우리는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시고 공급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빈번하게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서로 다투고 헤어집니다. 우리는 물질적 이해관계를 초월할 때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언제나 동일하신 주님만을 따르자(히 13:7-13)

7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일러 주고 여러분들을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죄를 위해 그 피를 성소에 가지고 들어간 짐승의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 그러므로 예수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도 그분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분에게 나아가자.

7절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일러 주고 여러분들을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교인들을 인도하는 자들은 목사와 장로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파악하여 해석하고 전달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성경말씀을 통해 또 성경적 설교 즉 성경의 바른 해석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목사와 장로들은 먼저 모든 성도들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利)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고 합니다(벧전 5:2-4).

교인들은 목사와 장로들의 인도와 지도에 잘 따라야 합니다. 교인들은 인도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행실의 마지막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생각하다’는 원어(므네모뉴오 mnemoneuvo)는 ‘기억하다’는 뜻입니다. 좋은 모범을 보인 인도자들은 바른 설교와 바른 행위를 보여주었을 것이고 그 마지막도 좋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지도자들의 행실의 마지막을 주의하여 보아야 합니다. 물론 바르지 못한 설교와 나쁜 행위로 나쁜 모범을 보이다가 불쌍한 마지막을 가진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배신했던 가룟 유다 같은 제자, 세상을 사랑하여 떠나갔던 데마 같은 제자가 그러하며 또한 돈과 명예와 육신적 쾌락에 빠진 자들이 그러합니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통해서도 경고를 받아야 하지만, 특히 진실한 목사와 장로들, 모범적인 인도자들의 생애를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Jesus Christ the same yesterday, and to day, and for ever.” 이 요절은 전도자 무디( Dwight Lyman Moody, 1837∼1899)가 가장 좋아했던 구절로 시카고에 있는 무디 교회당(The Moody Church) 발코니에 새겨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으로 세상에 오신 우리의 참 인도자이십니다. 언제나 동일하신 주님이십니다. 마태복음 23:8-10,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귀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지금부터 2천 년 전에도,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또 세상 종말까지, 천국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하십니다.

9절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여러 가지’라는 원어(포이킬로스 poikilos)는 ‘다양한’이라는 뜻이고, ‘다른’이라는 원어(크세노스 xenos)는 ‘이상한’이라는 뜻입니다.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이란 세상 사람들의 기호에 맞추어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부패시키고 변질시키는 교훈들을 가리킵니다. 영지주의, 뉴에이지 사상, 종교 통합주의가 그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불변하심은 그에 관한 교리의 불변성을 말합니다. 기독교 진리는 가감할 수 없이 고정된, 명확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시대마다 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순하고 명확하고 불변적인 진리를 버려두고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계는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이 교회들 안팎에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 성도들은 오늘날 유행하는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에 이끌리지 말고 바른 교훈, 즉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에 굳게 서야 합니다. 우리는 그 옛길, 그 건전한 길, 보수신앙을 붙 들어야 합니다.

성경 진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소식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이며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도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귀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단지 음식을 먹는 교제가 아니고 성경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 하며 하나님 안에서 서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라고 강건케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10-13절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죄를 위해 그 피를 성소에 가지고 들어간 짐승의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그러므로 예수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분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분에게 나아가자.”

율법에 규정된 대로, 속죄제 중에 그 피를 제사장이 성소에 가지고 들어가지 않은 경우는 그 고기를 제사장이 회막 뜰에서 먹을 것이지만, 성소에 들어간 경우는 그 고기를 먹지 못하고 그 전체를 진 바깥 재 버리는 곳에서 불살라야 했습니다(레 4:5-11; 6:26, 30).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하나님의 모든 택한 백성들을 위한 속죄 제사였습니다. 대제사장이신 그분은 그분의 피를 가지고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으므로 그분의 육체는 진 밖에서 불살라지셔야 했고 그래서 예루살렘의 성 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것입니다.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받으신 것이었다.

‘능욕’이라는 원어(오네이디스모스 oineidismos)는 ‘비난, 불명예, 모욕’을 뜻합니다. ‘그분의 능욕’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비난과 불명예와 모욕을 가리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비난과 불명예와 모욕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그분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영문’은 ‘진영’(陣營)이라는 말인데 진영은 사람들이 사는 곳을 가리킵니다. 성도들은 세상의 핍박을 받을 때 사회 밖으로 쫓겨날지도 모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성도들이 일반 사회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제국의 핍박을 피해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에서 생활해야 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능욕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 주님의 가신 그 고난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3. 찬송과 선행의 예배(히 13:14-25)

14 이는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기 때문이니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분의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께서 이같은 예배를 기뻐하시느니라. 17 이는 여러분들을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여러분들의 혼들을 위하여 깨어있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기 때문이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기 때문이라. 19 내가 더 속히 여러분들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여러분들이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20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영원무궁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께서 21 모든 선한 일에 여러분들을 온전하게 하사 자신의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분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분께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22 형제들아 내가 여러분들을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여러분들에게 썼느니라. 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여러분들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여러분들을 보리라. 24 여러분들을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탈리아에서 온 자들도 여러분들에게 문안하느니라. 25 은혜가 여러분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14-16절 “이는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분의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께서 이 같은 예배를 기뻐하시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능욕 즉 그분의 비난과 불명예와 모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분에게 나아가야 할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우리가 장차 올 것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즉 현실은 그리스도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고난의 생활이지만, 장차 영광의 천국에 들어갈 것이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예수님의 대속 사역으로 우리가 죄 사함의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에 라는 뜻입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신약 성도는 삶 자체가 ‘거룩한 산 제물’이며(롬 12:1) 찬송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창조하신 목적이 찬송을 받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찬송은 구원받은 모든 성도의 존재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또 찬송은 그의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증거 한다’는 원어(호몰로게오 homologeo)는 ‘감사한다’는 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찬송은 인생의 목적에 합당한 가장 좋은 입술의 열매입니다. 우리의 입술은 남의 인격을 허물고 남을 거짓 되게 비난하는 일에 사용되었으며 종종 더러운 욕설이나 음란한 말의 도구가 되지는 않았던가. 이제 이런 더러운 입술이 정결케 되어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입술이 되어야 합니다. 또 우리는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고 힘써야 합니다. 13장에서는 예수님은 사랑의 완성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제물로 영문 밖에서 희생하신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이 사랑을 이웃과 나눔이 주님께서 열납 하시는 예배입니다. 이런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의 요지는 첫째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는 것(worship service)과, 둘째로 서로 사랑하고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mutual service). 선행은 구원받은 성도의 열매입니다. ‘서로 나눠주기’라는 원어(코이노니아 koinonia)는 ‘교제, 구제, 구제 헌금’이라는 뜻으로 선행과 구제는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힘써야 할 섬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 먼저는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며, 그다음은 이웃을 향한 선행도 구제가 실천되는 예배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의 생활화입니다.

17절 “여러분들을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이는 그들은 여러분들의 혼(souls)을 위하여 깨어있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기 때문이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회중의 인도자들, 즉 목회자들과 장로들은 교인들의 영혼을 위하여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결산(決算 give account)할 자들처럼 깨어 있어야 합니다. 또 성도들은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인도자들은 교인들을 위해 즐거움으로 일하게 될 것이며 근심으로 하지 않게 될 것이며 그것이 또 교인들에게 유익이 될 것입니다.

18-19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기 때문이라. 내가 더 속히 여러분들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여러분들이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바울은 성도들에게 자주 기도의 요청을 합니다. 엡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살전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살후 3:1, “형제들아, 여러분들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들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18-19절에서 바울이 수신자들인 유대인들에게 기도를 요청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그는 그와 그의 일행이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선한 일을 위해 힘쓰고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행하는 선한 일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둘째로, 그는 그가 더 속히 그들에게 돌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히브리서 수신자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가 지금 이 곳에 있습니다. 설교자는 교인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며, 교인들은 설교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20-21절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영원무궁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일에 여러분들을 온전하게 하사 자신의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분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분께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기원의 내용은 우선 예수님에 관해 세 가지를 증거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양의 큰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부르십니다. 요 10:11, 14,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베드로는 예수님을 ‘목자장’이라고 부릅니다(벧전 5: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교회의 크시고 참되신 목자이시며, 인간 목사들은 작은 목자들에 불과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영원한 언약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히 7: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무궁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구약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자로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증거 하신 신약은 수정될 수 없는 영원한 언약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언약의 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분의 부활은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충분히 증거 하십니다. 행 17:31, “이에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평강은 죄로 인하여 상실되었습니다. 사 57:21,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의 영원무궁한 언약의 피로 죄 사함 받은 혼들(souls) 속에 평강이 임하십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신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선행과 순종을 온전케 이루시기를 소원하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도들의 선행과 순종의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선행과 순종은 단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됩니다. 우리는 다른 특별한 일을 위해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일에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다 행하게 하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왕이십니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는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 말씀입니다. 이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증거 합니다. 계 5:12의 말씀과 같다: “천사들이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히브리서 강해를 마무리 하면서 22-25절로 대신합니다. 본 서신의 수신자처럼 말씀을 받읍시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분들을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여러분들에게 썼느니라.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여러분들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여러분들을 보리라. 여러분들을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탈리아에서 온 자들도 여러분들에게 문안하느니라. 은혜가 여러분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다른 바울 서신처럼 히브리서도 마지막 안부와 축도로 마칩니다. 사도 바울은 본 서신을 받는 교인들에게 그의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고 부탁합니다. 그는 디모데를 ‘우리 형제 디모데’ 부르는 살전 3:2에서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속히 오면 그와 함께 그들에게 가서 만나보겠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두 부류로 표현됩니다. 첫째는 ‘인도하는 모든 자들’ 즉 목회자와 장로들이며 둘째는 ‘모든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초대교회로부터 교회에 목사와 장로들을 세우셨습니다(행 14:23; 20:28). ‘이탈리아에서 온 자들’이라는 말은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도 복음이 증거 되었음을 보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히브리서를 거듭 읽으시면서 예수님에 대해 확실히 증거 하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오늘 히브리서를 마지막 장까지 읽게 하셔서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은 천사보다, 모세보다, 아브라함보다, 믿음의 모든 선진들보다 우월하실 뿐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완성하시고 소망을 완성하시고 사랑을 완성하신 참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날마다 주님을 더 사랑하게 하시며 “예수 사랑하심을 성경에서 배웠네.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였네(Yes, Jesus loves me, the Bible tells me so.)” 찬송 563장(통 411장) 부르며 예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게 하옵소서. 우리나라를 어떤 핵무기, 미사일, 테러, 코로나 바이러스, 자연재해, 재앙으로부터 지켜주시고 전쟁의 방법이 아닌 평화적으로 자유 민주주의로 통일되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다니엘이 본 네 짐승과 작은 뿔 환상(단 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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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3장

150408 히브리서 13장.hwp

오늘 우리들 히브리서 공부 마지막입니다. 벌써 13주가 다 지났군요. 히브리서를 여러분들이 각자 집에서 읽거나 다른 큐티 등으로 접할 기회가 있었겠습니다만 그래도 꼼꼼하게 같이 읽을 기회는 많지 않았을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히브리서는 신약성서 중에서도 앞에서 많이 우리가 접하는 게 아니라 조금 복잡하기도 해서 약간 뒤로 쳐지는 성경이었는데 그래도 이런 기회에 같이 읽으니까 여러 가지로 좋았습니다. 저도 많이 배웠고요. 1절부터 25절까지 있습니다. 일단 이 말씀을 교독해서 전체 읽고 천천히 전체 13장까지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설명을 하고 듣겠습니다. 교독하겠습니다.

1절,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2절,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3절,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4절,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5절,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6절,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7절,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9절,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10절,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11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절,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절,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절,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5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절,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17절,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18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19절,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20절,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21절,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2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23절,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24절,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5절,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오늘 여기 여러 가지 모양이 가지각색이에요. 주제가 앞에 하고는 좀 다르게 여러 가지 분산되어 있습니다. 종합적이라고 할 수 있고요. 특별히 여기에 13장, 마무리를 하면서 일부러 그걸 강조하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교회에서 지도자로 일하는 사람들을 좀 생각해라는 게 있네요. 지금의 목사를 가리키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고요. 하여튼 교회 공동체를 끌어가는, 말씀을 전하거나 목회를 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순종하라는 말도 있고 생각 좀 해라는 말도 있고 여러 가지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세 번이나 반복해서 나오고 있어요. 그런데 이런 말씀을 두고 ‘거봐라 성경에 있지 않냐, 교회 목사에게 순종해라’ 이렇게 말하면 좀 곤란한 겁니다. 모든 말씀이라는 것은 상황이 있기 때문에요. 이 히브리서 기자가 왜 그런 얘기를 했는지 전제하지 않고 무조건 이거를 일반화 시키면 성경을 좀 오해하게 되는 거죠. 이 말씀을 따다가 무조건 순종하라고 억압적으로 가르치면 안 된다는 얘깁니다. 아마 히브리서 공동체의 정확한 배경이 뭔지 정확하게 나오지 않아서 단정적으로 말하기 힘듭니다만 여기 지도자들을 생각해봐라 반복해서 하는 것을 미루어 볼 때, 거기에 지도자들을 함부로 대하는 그러한 풍토나 일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교회 질서가 허물어지고 덕스럽게 운영이 되지 않은 그런 것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건지 정확하게 모르겠어요. 네, 그런 것들이 있어요. 여기 본문에 해당하면 조금 더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여기 13장에서는 실제 어떤 생활에 대한 것을 여러 가지로 얘기하고 있어요. 신앙생활만이 아니라 관계를 어떻게 잘 해야 되냐. 그러한 것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 이런 것들은 예수님과의 관계잖아요.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하나님과의 일치, 종말에 대한 희망을 갖잖아요. 기본적인 신앙이잖아요. 그걸 전문적인 신앙 용어로 칭의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주일날 제가 서울에 예배 인도 하러갈 때 예배 마치고 신학공부를 해요. 지난 공부 주제가 칭의와 성화였어요.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 올려놨으니까 보십시오. 거기서 그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이야기했는데 다른 건 빼고 하나만 얘기할게요. 칭의, 이걸 굉장히 이론적으로만 생각하거든요. 예수 믿고 의롭다고 인정받았다, 믿음으로 된다, 그렇게만 생각을 하는데, 이러한 이론, 신학 개념들은 이론이기 전에 실체에요. 리얼리티에요. 그러니까 성서 기자들도 그렇고요. 신학자들도 그렇고 이론을 잘 계산해갖고 어떤 상을 만든 게 아니라, 하나님이 뭐다, 신앙이 뭐다를 말한 게 아니라, 먼저 하나님과 신앙의 실체를 경험한 거예요. 그걸 합리적으로 설명한 게 신학입니다. 칭의라고 하는 것은 정말 그 신앙의 능력 안에 들어간 사람의 체험에서 나온 이론적인 설명인 거예요.

그런데 이게 기독교인들이 이론에만 떨어져서 그게 어떤 건지를 조금 눈치를 못 챌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칭의의 능력, 역동성, 그거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어요. 우리 세상에서는 어떻습니까. 똑똑해야 인정받죠. 돈이 있어야 이 사람 괜찮다 인정받죠. 스펙이 있어야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다 그런 방식으로 이 세계가 돌아가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무시당하지 않습니까. 그런 세상을 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하다는 사실을 자기가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 된다면 능력 있게 사는 거죠. 보세요. 시시한 사람들이 인정하냐, 아니냐에 우리는 너무 예민하게 작용을 하는데 하나님이 인정한다, 너 의롭다, 칭의가 그런 말이니까요. 그 인정한다는 사실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이 날 인정하냐, 아니냐는 정말 작아지는 거예요. 이렇게 비유적으로 말해도 될까요. 어떤 학교에 한 반이 있습니다. 거기 한 학생이 있어요. 그 학생을 자기 친구들이 조금 소홀하게 대해요. 그런데 선생님이 얘를 인정해 주는 거예요. 약간 지능이 떨어진다고 해도 선생님이 인정해 주면 이 아이는 다른 아이들이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고 학교생활을 잘 할 수 있는 거거든요. 칭의라고 하는 거는 그냥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 세계를 완성하실 그 하나님이 의롭다 인정해 주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걸 아주 실질적으로 자기의 삶, 자기의 인식, 자기의 영혼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정말 자유로울 수 있는 거죠. 이건 자기 합리화가 아니고 더 근원적인 것에 대한 실질적인 깨달음이고 받아들이는 것이고 경험이기도 합니다.

조금 말이 옆으로 지나갔네요. 오늘 본문하고 직접 연관되는 건 아닌데 여기 신앙생활하고 실제 삶이 어떻게 연결 되나를 설명하려다 보니까 칭의가 뭐냐를 말씀드린 겁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칭의와 예수님과의 관계. 그러나 여기 히브리서 기자는 거기에 걸 맞는 실제 삶도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어요. 그걸 신학적인 용어로 성화라고 합니다. 칭의와 성화라고 합니다. 성화는 실제적으로 삶이 변화되는 거잖아요. 이 두 관계가 어떤 거냐를 아주 오랫동안 기독교 신학에서 논의가 됐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 들어가서 보시기 바랍니다. 1절에서 3절 사이에 세 가지 삶의 중요한 태도를 가르쳐요. 세 가지예요. 형제 사랑, 손님 접대, 갇힌 자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취해야 될 삶의 태도를 가르치는 거죠. 형제 사랑, 손님 대접, 갇힌 자라고 하는 것, 이것도 일일이 다 어떤 거냐를 꼼꼼히 살피려면 여러 가지를 얘기할 수 있습니다만 이렇게 정리를 하면 되겠죠.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실질적으로 우리의 영혼, 우리의 삶에 받아들여진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그 시각으로 이웃들을 대하게 되거든요. 나그네, 손님들, 형제, 그리고 이런저런 모양으로 어려움을 당한 갇힌 자들을 생각하고 또 그런 삶들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서로 돕고 힘을 나눠야겠죠. 그런데 이런 문제를 단순히 윤리, 도덕적으로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윤리, 도덕주의는 아니에요. 윤리, 도덕적으로 살되 그건 단순히 윤리학은 아니 겁니다. 그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도 그렇게 살잖아요. 말하자면 휴머니즘이죠. 그건 아름다운 거예요. 기독교인이 휴머니즘적으로 사는 건 당연하되 기독교 신앙이 휴머니즘은 아닌 거예요. 그걸 여러분들이 잘 더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4절. 여기는 결혼을 귀하게 여기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도 일반적인 가르침이죠. 음행하는 자들, 간음하는 자들에게 심판이 임한다는 얘기를 했는데요. 사실은 한, 두 마디 갖고 그런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이게 일종의 성윤리라고 할 수 있어요. 가정 윤리라든지. 그런 것들이 시대마다 조금씩 다르기도 해요. 그리고 기독교가 처음 시작할 때 나온 문제들은 로마 윤리하고 굉장히 많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걸 조금 구분해서 봐야하는데 너무 전문적인 거라서 사실은 일반 신자들이 그걸 다 구분해서 보기는 힘듭니다. 이런 거예요. 갈라디아서에 있는 것들을 보면 성령의 열매들 있잖아요. 그런 것들은 기독교적이라고 보다도 사실은 로마의 윤리적인 가치, 용어들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관용에서 사랑까지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한 구절을 갖다가 기독교인들은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그게 바로 복음적이라고 설교를 하면 조금 부족한 거예요. 관용적으로 살아야죠. 그러나 그건 일반 윤리이고 다 좋은 거예요.

성경 내용이 어떤 사실을 얘기하잖아요. 어떤 때는 사실 자체가 중요할 때가 있고 어떤 때는 사실을 지칭, 가리킬 때가 있는 거예요.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어떠한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그 사실이 말하려고 하는 다른 게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라고 하는 것은 하나하나를 기독교적인 신앙의 본질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가 욕을 먹기도 하고 혹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뭔가 혼란스러워서 ‘예수 믿어도 변한 게 하나도 없네’ 교회 안에서 싸우고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가르친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우리가 의로워지고 그 복음 안에서 우리가 구원 받는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위기를 느끼게 된 거예요. 그런 걸로만 충분하지 않으면 율법이 필요한 거예요. 하나하나 가르쳐야 되는 거예요. 일일이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아이들 가르치듯이, 가정에서 부모가 아이들에게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고 책 하루에 얼마나 읽어야 돼’ 이런 것처럼 실질적으로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가르칠 필요가 있지 않냐 그러한 요구가 교회 안에서 나오게 된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 율법과 복음의 관계가 격렬하게 논쟁이 벌어지잖아요. 그런 걸 갈라디아서 앞부분에서 쭉 이야기한 다음에 이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이런 것들을 언급함으로써 기독교인 공동체가 복음에 완전히 자리를 잡고 거기에만 집중하되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부도덕한 일을 하는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소극적으로 말하기 위해서 바울이 그러한 열매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열매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갈라디아교회가 처한 형편에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뭐냐를 설명하려고 하는 겁니다. 좀 까다롭죠. 일반 신자들이 성전 읽고서 그런 것을 다 분석하기가 굉장히 어렵죠.

제가 4절을 설명하다가 옆으로 얘기가 나왔는데요.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핵심은 결국은 성윤리, 로마 시대가 굉장히 혼탁했죠. 조금이 아니라 많이 나빴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들과 좀 달라야 하는데, 성도라는 뜻이 다르다는 뜻이에요. 구별됐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로마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행하던 성윤리, 그런데 좀 끼지 마라 그런 얘기인 거죠. 그 당시에는 매음굴, 창녀촌이라고 하나요. 굉장히 일반화 됐습니다. 그래서 사생아들이 많이 태어났어요. 아기들을 로마 광장에다 버리면 소위 말해서 포주들이라고 할까, 그런 사람들이 끼워서 다시 윤락가에 보내고요. 아주 극단적인 경우에는 자기들은 모르지만 남자가 윤락가의 여자 대상이 자기의 딸일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동성애 이런 것도 굉장히 파괴적인 일이 있었어요. 원래는 헬라 시대 때는 좋은 거였어요. 이 표현이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플라토닉러브, 이게 동성애였어요. 그 당시는 결혼해서 남, 여 간의 관계가 애기 낳는 게 목적입니다. 그래서 정말 순수한 사랑은 애기 낳는 게 목적이 아니라 다른 거다. 플라톤 시대에 플라토닉러브라고 해서 가장 이상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동성애였어요. 이건 제 얘기가 아니라 문헌에 다 있는 내용입니다. 그게 로마시대에 들어오면서 동성애가 굉장히 타락한 방식으로,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점점 문란하게 돼서 바울이 경고 한 거죠. 그게 로마서 앞부분에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누누이 말씀드립니다만 성경 말씀은 다 배경이 있어서 그런 것들을 촘촘히 따지지 않고 그것만 가져다가 ‘봐라! 이렇게 해야 된다’ 이런 식으로 하면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 5절에서 6절.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나왔네요. 이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쉽지가 않죠. 기독교인들도 이런 점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아요. 돈을 사랑한다. 표현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도 사랑하고 돈도 사랑하고. 둘 다 진정한 사랑은 못 되죠.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운명을 맡기는 건데 하나님에게 맡기는 거하고 돈에게 맡기는 것,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을 두 가지는 하지 못합니다. 이게 지금의 자본주의, 더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속에서, 돈이 아니면 아무것도 못하는 시대 속에서는 이렇게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 하나님이 우리 생명의 근거라는 걸 더 철저하게 깨닫는 것,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나가서 개인이 그런 것을 다 못하니까 사회 구조가 그렇게 되도록 달라져야 돼요. 정치적인 것들도 필요합니다. 복지 문제도 우리의 현황이 되고 있는데 약간 경쟁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인간다운 삶의 품위를 잃지 않고 살아가도록 국가차원에서 보장 해준다면 그렇게 돈에 많이 치우치지는 않을 수 있거든요. 목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목회 활동이 점점 열악해져서요. 목사의 품위, 좋은 뜻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목사에게 품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태도잖아요. 그렇게 하면서 목회하기가 쉽지 않아요. 젊은 목회자에게 더 그렇습니다. 부목사를 간다고 하더라도 일 년 뒤에 평가를 받아야 하거든요. 학생회, 청년회, 어느 교구를 맡았던지 그 동안 얼마나 성정을 시켰는지를 평가 받고요. 그렇지 않은 교회도 있습니다만 전반적인 추세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조금 온순한 목사들은 일반교회 부목사로 견디기 힘듭니다. 그러면 자기 뜻대로 양심껏 하려면 담임목사를 가야하는데 자리가 없어서 갈 수가 없어요. 굉장히 어려운 상태인데다가 신학생들은 계속 많이 나오고요. 수요는 점점 줄어드는데 공급은 계속 되고 있으니까 불균형, 이게 목사들끼리 경쟁이 더 심해지고 교회들끼리 경쟁이 더 심해지다 보니까 자기를 비하하게 되거나 과욕을 많이 부리게 되고 총체적으로 악순환 속에 빠져있습니다. 하여튼 품위인데 복지가 최소한 보장이 되면 그런 것들을 우리가 이겨나갈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두 가지 방법이에요. 기독교인들이 똑바로 자기의 신앙적인 인식을 분명하게 함으로써 돈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 생명이 확보된다는 것을 정말 깊이 깨닫는 것하고 그 다음 사회 구조가 그렇게 변하도록 서로 노력해 나가는 것. 같이 좀 병행해야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을 아주 실질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7절, 8절. 드디어 여기 나오네요. 교회 지도자들을 좀 생각해라. 7절에 나오죠. 너희를 인도하던 자를 생각해라 그런 얘기입니다. 그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오늘날하고 상황이 다르게 순교도 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 다음 9절. 이것도 여러 가지 교훈 중에 하나에요. 영적인 가르침 중에 하나입니다. 여기 9절에 재미있는 게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하는 것으로 유익을 얻지 못한다고 되어 있죠. 이거는 음식 규정, ‘이걸 먹어야 되냐, 말아야 되냐’ 그러한 율법적인 규정을 잘 지켜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려는 그러한 것들. 그건 별 거 아니다. 그런 것들로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 한다 그걸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10절에서 16절. 이건 조금 복잡한 이야기에요. 그리고 학자들도 이게 정확한 뜻이 뭔가를 다 풀지 못했어요. 부분적으로 그렇습니다. 난해 구절이라고 할 수 있어요. 10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이게 무슨 비유, 상징이라고 얘기하는데, 그냥 제가 하나의 틀로만, 전체적인 그림으로만 설명하겠습니다. 여기서 제단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켜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 소유한다거나 거기 가까이 갈 수 있다거나 그렇게 되지 못 한다. 그건 전혀 다른 세계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다고 표현한 겁니다. 그런 것들을 그 뒤에서 조금씩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벌어졌던 상황을 설명하면서 말하고 있어요. 12절 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도 자기 피로써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여기서 성문이라고 하는 것은 골고다인데 예루살렘성 밖이라는 뜻입니다. 성이라면 예루살렘 성이죠. 안에서 십자가 달리신 게 아니라 밖으로 나오셔서 고난 받으셨어요.

13절,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가자, 우리도 예루살렘 성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자는 뜻입니다. 그 당시에는 예루살렘을 절대적인 도성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거기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고요. 그게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는 제단, 골고다죠, 성문 밖에 있는 그거는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하는 그런 방식으로 도달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고 두루두루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걸 14절에서 좀 더 정확하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영구한 도성, 영원한 성읍, 하나님 나라, 그런 건 없다. 어디에도 없다. 예루살렘 성전도 아니다. 예루살렘 도시도 아니다. 물론 로마 제국, 황제도 아니다. 그건 장차온다. 새 예루살렘과 새 땅,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는 겁니다. 장차 올 것을 찾는다고 되어 있잖아요. 어떻습니까. 요한계시록에도 제가 지금 인용한대로 새 예루살렘 그 얘기가 나오거든요. 새 하늘과 새 땅 얘기 하거든요. 온다고 하는 것이 실감이 나나요? ‘하나님 나라가 온다.’, ‘하늘에서 내려온다.’ 이러한 표현들 말입니다. 그건 바깥에서 주어진다는 뜻인데 우주 공간 어디에서 내려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이해하기 힘든 게 우리는 세계를 표면적으로만 이해하면서 살아서 그렇습니다. 이 나무 책상입니다. 우리는 그냥 나무 책상으로만 생각해요. 그런데 이게 하늘이 될 수 있는 거예요.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세계의 질적인 변화를 가리키는 겁니다. 그게 하늘이 우리에게 오는 거죠. 그런데 제가 그걸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없습니다. 그건 아무도 묘사할 수 있는 게 아닌 거예요. 하여튼 그런 정도까지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변화될 때를 기다려야 되는데, 부활도 그런 거예요. 저도 전적으로 변화 됐으면 좋겠어요. 현대와 같은 상태, 이런 거로는 영원한 생명하고는 거리가 머니까, 그러나 현재 이 몸도 중요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요. 예수님을 통해서 전적으로 새로운 것으로 변하는 그 때를 저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생각이 나네요. 오늘 입관 예배 갔다가 제가 성경을 한 군데 읽었어요. 간단하게 설교를 했는데 그 부분이 기억이 또 나네요. 지금 전적인 변화를 얘기하다 보니까요. 한 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4절,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 탄식이죠. 아무리 기쁜 일이 있어도, 좋은 일이 있어도, 이상하게 모든 좋은 일들은 짐하고 같이 옵니다. 모든 게 그래요. 그래서 이 삶은 숙제를 푸는, 짐을 진 것과 같은데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하는 게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죽을 거잖아요. 생명에 삼킨바 된다. 우리가 없이 지는 게 아니라, 여기서부터 완전히 초월하는 게 아니라, 생명으로 삼킨바 되는, 그 때를 우리가 바란다는 거죠. 바로 앞서 말씀드린 우리의 질적인 변화, 그게 예수님의 재림의 때이고요. 그걸 우리가 기다리고 사는 거다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두 가지입니다. 여러분 강의 요약문 보십시오. 10절에서 16절이라고 쓴 대목의 밑에 있습니다. 두 가지예요. 하나는 15절이 가리키는 찬송의 제사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고요. 둘째는 16절이 말하는 선한 행위이다. 재밌게 16절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선을 행하고 나눠주는 것을 제사의 차원으로 설명하고 있네요. 일상의 제사죠. 앞에 있는 거는 실제 우리가 예배드리는 제사고요. 제사라기보다도 찬양이죠. 두 번째 선함과 함께 나눔, 이런 것들은 일상의 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전체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주제와 연관되는 거예요. 신앙의 중심과 하나님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면서, 그거로만 끝나지 않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이웃과의 관계로 확장되는 성화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17절에서 19절. 여기에 두 번째로 교회를 인도하는 자들과의 관계에 대한 충고가 나오네요. 재밌게 표현이 되어있어요. ‘순종하라, 복종하라’ 그런 얘기도 하고요. 그 다음 좀 내려오면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런 일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억지로 하게 하지 말라고 얘기했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다. 밑줄 쳐 놓고 잘 읽어두세요. 그리고 저를 잘 봐주십시오. 저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늘 즐겁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하면서 18절에 보면, 위해서 기도하라. 이것도 교회 지도자들이죠. 우리가 바로 지도자들입니다. 그 다음, 20절에서 21절까지. 여기는 축복입니다. 축복기도에요. 내용이 재밌습니다.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강의 하나님, 쭉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마지막으로 22절에서 25절입니다. 마지막 인사 몇 마디에요. 22절에 보면,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여태까지 권면한 거예요.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그런데 간단한 건 아니네요. 13장까지 굉장히 길게 썼는데 간단하게 썼다고 했을까 모르겠네. 하고 싶은 말이 더 많았는가 봅니다. 줄이고 줄여서 썼나보네요. 23절,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은 것을 너희가 알라, 감옥에 같이 있다가 풀려났나 봐요. 이런 걸 보면 바울이 이 편지를 썼다는 암시이기도 하고 아니면 바울과 아주 가깝게 아는 어떤 사람일수도 있고요. 디모데하고 같이 일 한, 감옥에까지 같이 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4절, 여기도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이 또 나오네요. 문안하라, 그렇게 얘기했고요.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지금 히브리서를 쓴 사람이 방문을 받았나 봐요. 이달리야, 이탈리아죠. 로마 교인들이 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25절에서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들에게 있을지어다.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은혜라고 하는 한 마디만 우리가 잘 생각해도 우리 신앙이 깊어질 뿐만 아니라 우리 실제 삶에 역동성이 생겨요. 이거는 사회에서 심리 치료 받고, 힐링 치료 받는 거하고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이걸 자꾸 놓치기 때문에 다른 데 한눈을 파는 거죠. 은혜라고 하는 것, 받았다고 하는 것, 선물이라고 하는 것, 그래서 은혜 한 마디만 가지고도 사실은 많은 이야기가 가능한 거예요. 그냥 받았다고 하는 것, 너무 크기 때문에 돈으로 계산할 수 없다고 하는 것, 그 사실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게 된다면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세상은 다 주고 받고 하는 차원인데 전혀 그렇지 않은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우리 앞에 있다는 것, 이거를 알고 사는 사람이 있고 모르고 사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우리가 13주에 걸쳐서 히브리서를 같이 공부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천년 전, 전혀 우리와 상관없던 시대와 그 지역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던 이들의 문서가 어떻게 지금 여기까지, 특별히 우리 대구샘터교회, 수요일 성경 공부하는 이 시간까지, 우리가 함께 읽고 공부할 수 있는 이 시간까지 내려왔는지 그 신비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면 입을 다물 수 없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13주 동안 같이 공부한 히브리서의 그 영적인 깊이, 그러한 리얼리티, 우리의 신앙의 긴 발걸음에 좋은 디딤돌이 되도록 인도 해주십시오. 우리 다시 또 새롭게 다음 주부터 시작하게 될 욥기서 공부할 때도 진리의 영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실 줄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히브리서 강해

히브리서 강해 김효성 목사 2019년 1월 10일 수정 자료 내려받기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교회의 전통적 견해를 버릴 타당한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히브리서 서론 1장: 천사보다 뛰어나심 2장: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 3장: 모세보다 뛰어나심 4장: 우리의 연약을 경험하신 분 5장: 멜기세덱 같은 대제사장 6장: 확실한 소망 7장: 더 좋은 소망 8장: 더 나은 직분 9장: 영원한 단번 속죄 10장: 담대히 서로 격려함 11장: 믿음의 선조들 12장: 거룩함을 이룰 것 13장: 사랑과 선행에 힘쓸 것 서론 히브리서는, 요한일서처럼 서두에 서신의 관례적 문안인사가 없으나 끝부분(13:22-25)은 본서가 서신임을 보인다. 본서는 신약성경 중에서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책이다. 본서는 동방에서는 대체로 바울의 저작으로 인정되었으나 서방에서는 오랫동안 논란되었다. 그러나 일찍이 로마의 클레멘트, 폴리갑, 순교자 저스틴 등은 본서를 인용했다. 주후 200년경에 쓰여진 체스터 베티 파피러스(p 46 )에는 히브리서가 바울 서신들 가운데 나온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바울이 히브리서를 히브리어로 썼으며 누가가 그것을 헬라어로 번역했다고 말했고( 교회사, 6. 14), 오리겐은 반복해서 히브리서를 바울의 글로 인용했다. 유세비우스 자신은 본 서신이 바울에 의해 본래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로마의 클레멘트가 번역하였다고 주장했다. 아다나시우스는 본 서신을 바울의 14권의 서신들(목회서신 전에) 중에 포함시켰고 그 후 헬라어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본 서신을 바울 서신으로 보았다. 주후 397년 제3차 칼타고 회의는 신약정경 27권 목록을 선언하면서 바울의 13권의 서신을 열거한 후 “동일한 저자에 의해 기록된 히브리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히포 회의(419년)와 후에 화란 신경은 바울의 14서신을 말했다. 그러나 초대교회 때로부터 히브리서의 저자를 잘 모른다거나 저자가 바나바라는 견해도 있었다. 내용적으로, 본 서신에는 사도 바울을 저자로 보이는 것 같은 점들이 있다. 사도 바울의 오랜 동역자 디모데에 대한 언급(13:23)이나 또 바울 서신들과의 언어적, 사상적 유사성, 예컨대 1:4 (빌 2:9), 2:2 (갈 3:19), 2:10 (롬 11:36), 7:18 (롬 8:3), 7:27 (엡 5:2), 10:33 (고전 4:9), 11:13 (엡 2:19), 12:22 (갈 4:25-26), 13:5 (딤전 3:3; 6:7-8) 등이 그러하다. 본 서신의 서두에 바울 자신의 이름을 언급지 않은 것이나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밝히 증거된 이신칭의(以信稱義)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 등이 바울 저작의 반대되는 증거로 주장되기도 하였으나, 사상의 일치성 때문에 그것들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본 서신의 수신자 는 예루살렘 부근의 유대인들이었고, 저작 연대 는 주후 67년경, 즉 사도 바울이 순교하기 직전 아직 성전이 있었던 때인 것 같다. 본 서신에서 성전과 제사장에 대한 언급에 현재시제의 구절들이 많기 때문이다(8:4, 13; 9:4-5, 9; 10:1, 8, 11; 13:10-11). 본서의 특징적 주제 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이다. 본서는 구약 제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완성되고 폐지되었음을 밝히 증거한다. 히브리서 7:18,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히브리서 8:13,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 그러므로 성도는 이제 신약 아래서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이다. 히브리서에는 ‘더 나은’ 혹은 ‘더 좋은’이라는 말이 13번 나온다(1:4; 6:9; 7:7, 19, 22; 8:6, 6; 9:23; 10:34; 11:16, 35, 40; 12:24). 히브리서의 진리는 신약성경의 진리, 특히 사도 바울의 다른 서신들의 사상과 완전히 일치한다.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율법의 글자]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고린도후서 3:9, 11,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골로새서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장: 천사보다 뛰어나심 [1-2절]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을 구약 계시라고 부른다. ‘계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를 비롯하여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라는 말은 구약시대에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여러 방식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양으로 직접 나타나셨고 꿈이나 환상 중에 나타나셨고 불과 구름으로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셨고 음성으로 말씀하셨고 기적들을 행하셨다. 또 그는 성령의 특별한 감동 중에 자신의 뜻을 선지자들에게 분명하게 알려주셨다. 선지자들은 자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을 명백히 구별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이렇게 임하셨다,’ 혹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분명하게 말하였다(렘 1:2; 호 1:1). 성경은 하나님의 나타나시고 말씀하시고 기적을 행하신 모든 행위들을 기록하고 설명한 책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특별계시들을 성경책에만 기록되게 하셨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권위가 있고 이 책의 내용을 가감해서는 안 된다(신 4:2; 12:32; 계 22:18-19).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라는 말은 신약시대를 말한다. 신약시대를 ‘이 모든 날 마지막’이라고 부른 것은 그 시대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역사에서 마지막 시대임을 나타낸다. 이것은 신약 계시가 마지막 계시임을 보인다. 구약 계시와 신약 계시를 비교하면 계시의 내용상 진전이 있었지만, 신약 계시가 마지막 계시이기 때문에 신약 계시를 넘어서서 어떤 내용의 추가나 보충이 없을 것이다. ‘아들로 말씀하셨다’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마리아에게서 나심, 그의 교훈과 기적 행하심, 그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그것들의 의미 등을 포함한다. 이것이 신약 계시의 내용이다. 아들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가 책에 기록되어 있다. 신약성경의 독특한 성격과 신적 권위성이 여기에 있다. 신약성경은 구약의 상징(예표)와 예언들의 성취라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고 바로 거기에 그 내용들의 신적 권위성도 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일진대, 신약성경은 더욱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약 계시는 구약 계시보다 뛰어난다. 왜냐하면 구약 계시에서는 상징적으로 또 예언적으로 주어졌던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내용들이 신약 계시에서는 실체적으로 드러났고 완전히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 계시의 상징의 실체이시며 예언의 성취이시다. 구약시대에 감취어 계셨던 그는 때가 되어 나타나셨다. 그는 사람으로 오셨고 하나님의 뜻인 택자들의 속죄사역을 다 이루셨다. 신약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과 온전함을 위해 계시하기를 원하신 만큼, 또 우리가 알아야 할 만큼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계시하였다. [2-3절] . . .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後嗣)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우리의] 1)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본문은 신약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 예수께서는 피조물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참여하신 창조주이시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그에 의해]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유의 후사로 세우셨다. ‘만유의 후사’라는 말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목표이심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만물 창조의 방법이시며 목표이시다. 시편 2:8,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마태복음 21: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골로새서 1:16,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를 위하여’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의 목표이며 목적이심을 보인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넷째로, 그 본체의 형상이시다. 이 표현들은 물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도 적용될 수 있지만(요 14:9; 고후 4:4, 6), 문맥적으로 볼 때(2, 3절) 그의 성육신 이전 상태를 가리키는 것 같다. 아버지와 아들 간의 영원한 관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신비에 속한다. 빌립보서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골로새서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다섯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 자이시다. 이것은 천지만물을 보존하시는 섭리 사역이다. 골로새서 1:17,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섭리하시는 자이시다. 여섯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셨다. 죄를 정결케 하신 일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이다. 죄는 인간과 세상의 근본 문제이었고 죄 문제의 해결은 주 예수께서 하신 바로 그 일이었다. 마태복음 9:6,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마태복음 20:28,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일곱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높은 곳에서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 이것은 그의 승천과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심을 가리킨다. 마가복음 16:19, “주 예수께서 . . .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로마서 8:34,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은 그가 하나님과 동등한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계심과 또 그가 온 세상과 교회를 통치하심을 보인다. [4-5절]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하셨는가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보다 뛰어나시다. 그가 천사보다 뛰어나심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더 아름다운 이름을 얻으셨기 때문이다. 시편 2편은 메시아에 대해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예언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내 아들’이라고 부르셨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신성(神性)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신 자이시다. [6절]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70인역, 신 32:43을 인용). ‘맏아들’이라는 원어( 톤 프로토토콘 ) 2) 는 ‘첫 번째로 나신 자’라는 뜻이다. 이 말은 예수께서 마리아가 낳은 맏아들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고(마 1:25 전통본문; 눅 2:7), 또 예수님 믿는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으나(롬 8:29), 본절에서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는 뜻으로 보인다.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3) 들어오게 하신다”라는 구절은 그의 탄생을 가리킨 것 같다( KJV, NIV ). 주께서 탄생하셨을 때 그 밤에 천사들은 하나님을 찬송했다(눅 2:13-14).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는 지금 하늘에서 천군 천사들에게 찬송을 받고 계신다(계 5:11-12). 그는 천사들과 비교할 수 없이 존귀한 분이시다. [7절]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선한 천사는 죄가 없고 거룩하므로 죄인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사역자들로서 바람과 같이, 불꽃과 같이 사용되는 자들임을 알아야 한다. [8-12절]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네가[주께서] 의를 사랑하고[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주께] 부어 네[주의]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 또 주여, 4)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천사들과 달리 친히 ‘하나님’으로 불리신다. 인용된 시편 45편은 메시아를 “하나님이여”라고 부르며 그의 보좌는 영원하며 그의 나라의 홀(笏)은 공의로운 홀이라고 말한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1:1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요한일서 5:20은 ‘참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디도서 2:13은 ‘크신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히브리서 저자는 또한 시편 102:25-27을 인용한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 피조 세계는 다 쇠하여지고 낡아지지만,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영존하시다. 본문은 메시아께서 이 피조 세계에 속하지 않는 신적 존재이심을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13-14절]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모든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하신 일들, 특히 천국을 기업으로 얻을 자들의 구원의 일을 위해 봉사하는 영들이다. 이에 비해,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는 말을 들으셨고, 그는 지금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아계신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시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능력과 권세와 영광을 가지심을 나타낸다. 이것은 아무 천사도 가지지 못하는 능력과 권세와 영광이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신약 계시가 최종적, 절정적 계시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내용과 여러 방식으로 말씀하셨고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셨다. 구약시대에는 예표적, 예언적으로 주어졌던 하나님의 계시들이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실체적으로 성취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하나님의 특별계시 중의 특별계시이시다. 신약계시는 하나님의 최종적, 절정적 계시이다. 우리의 구원과 온전한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는 이제 충분히 다 계시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성경의 가치를 인식하고 신약성경을 넘어서서 더 이상의 특별계시가 없고 이 책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려는 것은 극히 잘못임을 알아야 한다. 주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29-31). 우리는 신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해야 한다. 신약성경 외에 특별계시를 말하는 자는 이단이다. 요한계시록 22:18-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둘째로, 우리는 신약계시의 중심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그의 신적 영광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창조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유의 후사이시다. 죄 없는 새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피로 구속(救贖)함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예비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그의 본체의 형상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또 그는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 그는 섭리자이시다. 그는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셨다. 그것이 그가 하신 가장 큰 일이었다. 또 그는 지금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한 능력과 권세로 세상과 교회를 다스리신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귀한 이름을 얻으셨고 하늘의 천사들에게 경배를 받으시고 하나님으로 불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천사들은 바람 같고 불꽃같이 사용되지만,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의 신적 영광을 보고 그를 믿고 소망하며 찬송하자. 2장: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 [1절]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신 분이시므로’라는 뜻이다. ‘모든 들은 것’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을 가리킨다. 이미 1:2-3에서 말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요 그의 본체의 형상이시며 그를 통하여 모든 세계가 창조되었고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셨으며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고 만유의 후사이시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하시는 일 곧 창조와 섭리의 일을 하시고 하나님과 동등한 권세와 영광을 누리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가 들은 이 모든 진리들을 더욱 간절히 삼가야 한다. ‘삼간다’는 원어( 프로세코 )는 ‘주의한다. 주목한다’는 뜻이다. ‘더욱 간절히’라는 말은 강조하는 말이다.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는 말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이라는 뜻이다. 만일 우리가 모든 들은 것에 진지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배운 많은 성경 진리들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더욱 간절히 주의하고 주목해야 한다. [2-4절] [이는]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공의로운]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피할까 함이라.]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본문은 우리가 모든 들은 것을 더욱 간절히 삼가야 할 이유를 말한다. ‘천사들로 하신 말씀’은 구약시대에 주신 율법들을 가리킨다. 우리가 받은 구원을 ‘이같이 큰 구원’이라고 말한 것은 천사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구원이며 죄사함과 영생을 주시는 구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값없이 받은 은혜의 구원을 어떻게 소중히 여기고 간절히 주의하고 주목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말한다. 천사들을 통해 주신 율법도 어길 때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을 받았다면, 천사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크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구원을 우리가 소홀히 여길 때 얼마나 더 큰 심판을 받겠는가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구원을 거절하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요 3:36). 이것은, 주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범죄치 말고 진지하게 순종하며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친 말씀이다. 본문은 이 구원의 확실함에 대해 몇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로, 이 구원은 처음에 주(主)로 말씀하신 바이다. 구원의 복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증거하신 내용이다. 마가복음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둘째로, 이 구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이다. ‘들은 자들’은 주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듣고 따랐던 제자들을 가리킨다. 히브리서 저자가 ‘들은 자들’과 ‘우리’를 구별한 것을 보면,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제자들에게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 예수께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은 구원의 복음을 확증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그가 행하신 기적들을 직접 보았던 증인들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셋째로, 하나님도 기적들과 초자연적 은사들로 함께 증거하셨다. ‘표적’과 ‘기사’와 ‘능력’은 기적을 표현하는 세 단어이다. 표적(sign)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어떤 진리를 확증하심을 보인다. 기사(奇事, wonder)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줌을 나타내고, 또 능력(power)은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보인다. 또 ‘성령의 나눠주신 것’이라는 말은 성령의 은사들, 특히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 즉 방언, 예언, 병 고침, 기적 행함 등을 가리킨다. ‘자기 뜻을 따라’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를 나눠주심을 의미한다. 기적들과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시는 수단들이었다. 이와 같이, 성경이 증거하는 구원은 여러 면으로 확증된 확실한 것이요, 결코 불확실한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증거하신 바이었고, 그의 교훈들과 행한 일들을 직접 듣고 본 제자들이 확증한 바이었고, 또한 하나님께서 기적들과 성령의 은사들로 친히 증거하신 바이었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확실한 구원을 소홀히 여기고 등한히 여긴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5-9]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人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휘페르 판토스 )[각 사람을 위하여](관사가 없을 때)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은 복음의 내용인 천국을 가리킨다. 본문에 인용된 시편 8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존귀케 창조하셨음을 노래한 시이다. 본문은 사람이 범죄함으로 인해 잠시 천사보다 5) 못한 존재가 되었으나 결국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서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을 의미한다. ‘잠깐’이라는 원어( 브라퀴 )는 ‘잠시’ 혹은 ‘조금’이라는 뜻이다. 개인의 일생인 100년과 인류의 역사 6,000년은 ‘영원(永遠)’에 비추어 볼 때 ‘잠시’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려 하셨으나, 사람은 타락 후 오히려 만물에게 복종하고 있다. 우상숭배가 그렇다. 그러나 사람은 마침내 만물을 다스리도록 영광스럽게 회복될 것이다. 본문은 시편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시킨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택한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맛보셨다. 예수께서 택함 받은 각 사람을 대신해 죽음을 맛보신 것은 죄의 형벌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죄는 자신의 죽음이나 구주의 대리적 죽음을 필요로 하였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께서는 부활하셨고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으심으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다. [10절] 만물이 인하고( 디 호 타 판타 )[만물이 그 분 때문에 있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라는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킨다. ‘많은 아들들’은 택함 받은 자들을 가리킨다.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가리킨다. 구원의 목표는 영광 곧 죄가 하나도 없는 상태이다.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다는 말은 인간 예수께서 고난을 받음으로 온전한 구주가 되셨음을 말한다. [11-13절]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거룩하게 하시는 자’는 예수님이시며,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성도들이다. ‘다 하나에서 났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이 우리와 같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형제’라고 부르셨다(마 28:10; 요 20:17). 메시아 예언시인 시편 22:22에서도 그는 성도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른다. 또 ‘내가 그를[하나님을] 의지하리라’는 말씀도 그의 인성의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심을 보인다. [14-16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6) 예수께서 성도들과 같이 사람이 되신 것은 그들을 돕고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목적은 네 가지로 표현된다. 첫째로, 그것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기 위함이셨다. 마귀는 죄와 어두움의 세계의 왕이다. 죄의 결과는 사망이므로, 그는 또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택자들의 모든 죄와 그 형벌을 담당하여 죽으심으로 마귀의 권세를 파하셨다. 둘째로, 그것은 죽음의 공포에서 일평생 종노릇하며 살던 모든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이었다. 사람은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일평생 죄와 돈과 마귀에게 종노릇하며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이런 노예상태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17-18절]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救贖)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셋째로, 그것은 구원의 일에 있어서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救贖)하려 하심이셨다. 예수님의 대제사장 사역은 사도들의 서신서들에 증거되어 있고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지만, 그가 대제사장이라고 부른 책은 히브리서가 유일하다. ‘구속(救贖)한다’고 번역된 원어( 힐라스코마이 )는 ‘유화(宥和)한다, 노를 누그러뜨린다’는 뜻이다. 성경적 속죄 개념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노를 누그러뜨린다는 뜻이 있다. 넷째로, 그것은 친히 시험과 고난을 당하심으로 이 세상에서 많은 시험과 고난을 받는 택한 백성들을 도우시기 위함이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놀라운 구주이시다. 그는 하나님이시지만 낮아지셔서 사람이 되셨고, 또 죄가 없으셨으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가난과 비천함, 모욕과 핍박과 비난, 고난과 죽음을 경험하셨고 특히 인간의 시험과 연약을 다 경험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구주가 되셨다.

히브리서 2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이 크고 확실한 구원을 잘 보존해야 한다(1, 2절). 우리가 받은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이루신 큰 구원이며 많은 증인들의 증거와 하나님 자신의 기적들과 은사들로 증거하신 확실한 구원이다. 우리가 아무리 귀한 보화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잘 보존하지 못하고 잃어버리거나 도적을 맞는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귀한 보화일수록 보관을 잘해야 한다. 구원이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가치 있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마귀에게 도적 맞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신앙생활은 사람편에서의 성실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고귀한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더욱 간절히 주목하고 조심해야 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으로서 그의 고난과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셨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의 사역의 핵심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죄책과 죄의 형벌을 담당하신 대속의 죽음이었다. 그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없이하시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일평생 종노릇하며 살던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함이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마귀의 권세는 파하여졌다. 우리의 모든 죄책과 죄의 형벌이 단번에 다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죄책과 죄의 형벌에서 해방되었다. 넷째로, 우리의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친히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많은 시험과 고난을 받는 그의 택한 백성들을 도우실 수 있다. 그는 친히 사람이 되셔서 사람의 가난과 비천한 환경을 경험하셨고 사람들에게 모욕과 비난, 핍박과 고난을 받으셨고 친히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셨다. 그는 이 세상을 사는 우리를 친히 동정하시고 도우신다. 3장: 모세보다 뛰어나심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구원을 받아 거룩한 자들이 되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성도’로 불린다. ‘믿는 도리’란 우리의 신앙고백의 내용을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사도’(使徒)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예수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입은 자이시다. 그는 아버지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자주 언급하셨다(요 3:17; 5:36, 38; 6:29, 57; 7:29; 8:42; 10:36; 11:42; 17:3, 18; 20:21).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위해 제사를 드리는 중보자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2절]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예수님은 자기를 보내시고 세우신 하나님께 충성하신 자이시다.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충성한 것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보내시고 세우신 하나님 아버지께 충성하셨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을 양식으로 삼으셨고(요 4:34) 또한 죽기까지 충성하셨다(빌 2:8).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가 ‘충성된 증인’이라고 불리셨다(계 1:5; 3:14). [3-4절] [이는]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같음이니라]. [이는]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하나님이심이니라]. 모세는 구약시대에 큰 인물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영의 감동 가운데 구약성경의 핵심이 되는 처음 다섯 권의 책을 쓴 자이었다. 그는 선지자들 중에 큰 선지자이었고 하나님께서 친히 대면하여 아시던 자이었다(신 34:10).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세보다 더 영광을 얻으실 분이시다. 본문은 모세와 주 예수님을 집과 집 지은 자에 비교한다. 집을 보면 그것을 지은 사람이 있음을 알듯이, 우주 만물은 그것을 만드신 창조주의 존재를 증거한다. 이 놀라운 우주를 물질이 우연히 발전해서 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비이성적이다. 집은 피조물인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며, 집 지은 자는 이스라엘 백성과 온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창조주이시다. [5-6절]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장래의 말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속죄사역에 관한 것을 말한다. 모세를 통해 계시된 구약의 율법은 바로 이것들을 상징적으로 증거하였다. ‘사환’이라는 원어( 데라폰 )는 ‘수종자, 종’이라는 뜻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 곧 구약교회에서 하나님의 종과 수종자로서 하나님께 충성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셨다. ‘맡은’이라는 원어( 에피 )는 ‘위에서’라는 단어로 ‘다스림’을 나타낸다. 그는 교회의 머리이시다. 본문은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은 우리가 곧 그 집임을 증거한다. ‘담대함’이라는 원어( 파르레시아 )는 ‘담대함’ 혹은 ‘확신’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믿음을 소망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은 그것이 복음의 본질적 내용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대속(代贖), 그것에 근거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내용일 뿐 아니라, 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부활과 천국과 영생의 소망을 포함한다.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롬 8:24).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재림과 우리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의 소망의 담대함과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붙잡아야 한다. [7-8절]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시편 95:7-11이 ‘성령의 말씀’으로 인용되었다. 이것은 구약성경, 특히 모세오경이나 선지서들뿐 아니라, 시가서들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하나님의 권위로 인쳐졌다는 것을 증거한다(딤후 3:16).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읽고 연구함으로써 또 성경적 설교를 들음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옛날 이스라엘 백성처럼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생활했을 때 하나님을 시험했었다. 그들은 물이 없었거나 만나 말고 다른 것을 먹고 싶었거나 길이 힘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하고 하나님을 의심했고 하나님과 지도자 모세를 향해 불평했고 원망했었다. 그들은 마음을 강퍅케 했다.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할 때 믿음과 순종이 뒤따르지만, 교만하고 완고할 때는 불신앙과 불순종만 뒤따른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노를 격동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고 교훈하신 것이다. 마음이 강퍅해지지 않으려면 자신이 부정되고 부서져야 한다. [9-11절]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40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저] 7)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시험한다’는 말( 페이라조 )이나 ‘증험한다’는 말( 도키마조 )은 원어에서 비슷한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하시는 기적들이나 두려운 징계들이나 긍휼의 구원들이나, 그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과 인도하심을 경험했었다. 하나님께서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셨고 날마다 먹을 양식으로 만나를 내려주셨고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셨고 40년 동안 그들의 옷이 해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셨다. 그러나 광야에서 저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노하셨고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셨다. ‘내 안식’이란 일차적으로는 가나안 땅을 가리킬 것이지만, 좀더 깊이 말하면 우리가 장차 누릴 영원한 천국의 안식을 가리킨다. 천국은 안식의 땅이다. [12-13절]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옛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의 역사를 생각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약교회의 신자들 중에도 믿음이 없어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사람으로서 지극히 마땅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근본적인 악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를 붙잡고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불신앙은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며, 그 결과는 죽음과 불행이요 영원한 멸망이다.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은 성도들의 현재의 생활을 가리킨다. 우리에게는 오늘이 중요하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는 오늘이라는 날에 믿음으로 살고 순종으로 바르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또 우리는 오늘이라는 날에 매일 서로 권면함으로 우리 중에 죄로 강퍅케 되는 사람이 없도록 힘써야 한다. ‘권면한다’는 원어( 파라칼레오 )는 ‘권면한다’는 뜻 외에 ‘격려한다, 위로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말했다(살전 5:11, 14). 우리는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고 위로함으로써 더욱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다. ‘죄의 유혹’이라는 말은 ‘죄의 속임수’라는 뜻이다. 죄는 사람에게 좋은 것, 유익한 것, 기쁘고 즐거운 것을 줄 것처럼 다가온다. 죄가 일시적으로 그런 것을 줄지도 모르나 결과적으로 사람을 속인다. 그것은 얼마 가지 않아 갈등과 두려움과 슬픔과 고통과 파탄을 가져온다. 죄는 행복을 주지 않고 불행만 준다. 죄는 속이는 자이다. 죄의 속임으로 사람이 강퍅케 된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사실이다. 죄는 사람을 강퍅케 만든다. 그러므로 죄는 즉시 회개해야 한다. 죄는 병균과 같아서 몸 속에 놔두면 해롭다. 사람이 죄를 회개할 때 온유해지고 믿음이 회복되고 순종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범죄함으로 마음이 완고해지지 않도록 힘쓰고 또 다른 이들이 죄로 인해 마음이 강퍅하게 되는 자가 없도록 매일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고 믿음과 선행의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한다. [14절]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이라는 원어는 ‘확신의 시작’이라는 말로서 ‘처음 확신’을 가리킨다. 모든 성도는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모든 성도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다는 것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구주이심과,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을 받았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생을 얻었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 등을 확신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러한 기본적 진리들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얻는다. 모든 성도는 처음 확신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 오실 때까지, 혹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혹은 이 세상 끝날까지 성경의 모든 진리들을 다 믿고 확신해야 한다(행 24:14; 딤후 3:14). 우리가 처음 확신을 끝까지 가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참된 안식과 기쁨과 평안을 얻으며,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예비하신 복되고 영광스러운 천국에 들어가며, 거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과 존귀를 영원히 누리게 됨을 의미한다. [15-16절]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구출되었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음성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격노케 하였었다.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온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으로 하나님을 격노케 하였던 것이다. [17-19절] 또 하나님이 40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노하셨고 그들을 광야에서 다 죽게 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범한 죄는 무엇보다 불경건의 죄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바로 믿지 않고 마음을 다하여 그를 섬기지 않고 오히려 그를 거역하고 불평, 원망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섬기는 것이었다. 본절에 ‘그의 안식’ 곧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을 가리키지만, 그것은 또한 장차 영원한 천국에서 누릴 참 평안과 안식을 가리켰다. 가나안 땅은 영원한 천국의 예표이었다. 순종치 않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예비하신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들의 불신앙과 불평과 원망과 불순종은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왔다.

히브리서 3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의 대속 제물로 내어주셨다. 우리는 그를 바로 알고 믿고 사랑하며 존숭하며 그의 명령과 교훈을 따르자.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세보다 더 뛰어나신 자이시다. 모세는 구약시대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고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였고 구약성경의 핵심이 되는 처음 다섯 권의 책을 썼다. 그는 구약 종교의 기초를 놓았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연약한 한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집에서 종으로 충성한 자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며 충성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사랑하고 존숭하고 복종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굳게 믿고 순종하며 또 피차 권면해야 한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종살이하며 고통 중에 신음했던 애굽에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구출되었으나 어려운 일들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믿지 않고 하나님의 세우신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했고 거역하고 불순종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광야에서 다 멸망하였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신약 성도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이 실패의 역사를 거울삼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믿고 확신하고 순종해야 하고 또 피차 권면하고 위로 격려해야 한다. 4장: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1-2절]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이는]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주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을 받은 자들이다.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죽은 성도는 이미 그 안식에 들어갔다(눅 23:43). 또 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 모두는 다 변화를 받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교인들 중에 낙오자가 없도록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으로 화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때 믿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런 낙오자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3절] [이는]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들어감이니라].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이미 믿는 우리는 죽은 후에 하나님의 안식, 즉 영광스런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또 이 세상에서도 우리는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는 이미 하나님의 안식과 평안을 맛보며 누린다(마 11:28; 요 14:27). [4-6절] 제7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7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안식이 있고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다. 복음은 죄로 인해 저주받은 세상에서 수고로이 사는 인생들에게 안식의 소식이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시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하셔서 부르실 자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았으나 순종치 아니함으로 거기에 들어가지 못했다. 불신앙과 불순종은 구원의 길을 가로막는다. 사람은 자신의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 [7-9절]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여호수아를 통한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은 천국의 영원한 안식의 모형이었다. 영원한 안식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이 장차 천국에서 누리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의 수고로운 삶은 사람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로부터 왔다(창 3:17-19).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수고에서 구원을 얻고 평안과 안식을 정신적으로 이미 누리고 있고(마 11:28) 또 장차 천국에서 그것을 영육으로 풍성하게 그리고 영원토록 누리게 될 것이다. [10-11절]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예수님 믿고 죽은 성도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눅 16:22, 25; 23:43) 지금 천국에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고 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되다(계 14:13).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그러므로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자”라고 권면한다. 신앙생활과 성화(聖化)는 우리의 성실한 노력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물론 그러한 노력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믿고 순종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우리는 옛날 이스라엘 선조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의 본에 떨어지지 않도록 늘 깨어서 믿음과 순종의 삶을 힘써야 한다. [12-13절] [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드러남이니라]. 본문은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할 이유를 보인다. 즉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숨은 불신앙과 불순종을 남김 없이 다 들추어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의 마땅한 의무에 대해 깨달음이 부족하여 게으르고 부족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부족을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사람을 구원시키기에 유능하다. 이 말씀은 사람의 마음의 숨은 생각과 뜻을 꿰뚫어 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참으로 믿고 순종해야 한다. [14절]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브리서 저자는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심을 다시 한번 더 언급하면서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자고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구약시대에 에녹과 엘리야를 통하여 예표되었고 신약시대에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에서 증거되었다(행 1:9-11). 승천하신 그는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능력과 권세와 영광을 가지고 계심을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승천하신 신적 구주이신 큰 대제사장을 모시고 있다. 예수님은 구약의 대제사장들과 비교할 때 큰 대제사장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라고 말한다. ‘믿는 도리’는 우리의 신앙고백의 내용을 말한다. 그것의 핵심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속죄사역을 이루셨다는 내용이다. 우리는 그 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한다. 그것을 굳게 믿고 확신해야 한다. [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않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체휼하다’는 원어( 쉼파데사이 )는 ‘동감하다, 동정하다’는 뜻이다.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다. 그는 배고픔과 목마름과 피곤을 경험하셨고 미움, 비난, 욕, 배신, 매맞음, 또한 십자가 위에서 극심한 목마름과 고통까지 경험하셨다. 또 그는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는 죄가 없으셨다. 그는 참 사람이시며 또한 참 하나님이셨으므로, 그의 인성(人性)은 그의 신성(神性)의 도우심과 보호 속에서 무죄 상태를 유지하였을 것이다. 실상, 그는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죄인들을 위한 대속(代贖) 제물이 되실 수 있었다. 죄인은 자신의 죗값을 받아야 하므로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한 대속 제물이 될 자격이 없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께서는 대속 제물이 되기에 합당하셨다. 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대속 제물이 되시기에 합당하셨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다.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그러므로’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이와 같이 크신 대제사장, 하나님의 아들, 승천하신 자, 우리의 연약을 동정하실 수 있는 자, 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자가 계시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우리가 부족하거나 연약하지 않았다면 이런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신적 구주를 주셨던 것이다. ‘때를 따라 돕는’이라는 원어( 에이스 유카이론 보에데이안 )는 ‘때를 따라 적절한(timely) 도움을 위해’라는 뜻이다. ‘담대히’라는 원어( 메타 팔레시아스 )는 ‘담대히, 확신을 가지고’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이 필요한 때마다 그의 긍휼과 은혜를 얻기 위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그의 이름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확신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고 또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

히브리서 4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안식을 주기를 원하신다. 구원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계명에 순종함으로써이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를 거울 삼아 불신앙과 불순종을 버리고 믿고 순종함으로 안식에 들어가자.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도리를 굳게 잡자.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구주이시다. 그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후에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셨고 또 시시때때로 도우시는 중보자이시다. 우리는 날마다 성경말씀을 통해 그를 더욱 알고 믿고 확신하고 따르자. 셋째로, 우리는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는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 그는 우리의 부족과 연약을 잘 아시는 자이시므로 우리를 더욱 동정하시고 도우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적절한 도움을 얻기 위해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자. 5장: 멜기세덱 같은 대제사장 [1-3절]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대제사장은 사람들 중에서 선택되었다. 하나님께서 직접 그 역할을 하시는 것이 아니고 천사가 그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그 일을 한다. 대제사장을 사람들 중에서 택하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을 위해 속죄제물을 드릴 때 무지하고 미혹에 빠진 사람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구약시대의 대제사장들은 백성을 위해 속죄제사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였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는 사람의 연약함을 아시는 분이시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미 본 서신의 앞부분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2:18),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좋은 대제사장이시며 좋은 구주이시다. [4-6절]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나라에서 대제사장은 스스로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고 아론처럼 하나님께서 불러 주셔야 될 수 있었다. 예수께서도 대제사장의 존귀와 영광을 스스로 취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그를 높이셨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에서 그에 관하여 ‘너는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너는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고 하셨다. 이 메시아 예언들은 각각 시편 2:7과 시편 110:4에 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는 구절에서 ‘반차’라는 원어( 탁시스 tavxi” )는 ‘반열, 특질’이라는 의미이며, 시편 본문에 나오는 원어( 디브라 )는 ‘모습’이라는 뜻이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는 말은 ‘멜기세덱의 특질을 가진 혹은 그 모습을 좇는 제사장’ 즉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이라는 뜻이다. [7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이 세상에 계실 때]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할 수 있는 아버지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일을 가리켰다고 본다. 그 일에 대하여 누가복음 22장은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눅 22:41-44). 이것은 예수님의 인성(人性)의 신비를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동일하신 신성(神性)을 가진 하나님이시지만, 그는 또한 우리와 본질적으로 동일하신 인성(人性)을 가진 사람이시다. 예수께서는 눈물로 간절히 기도하셨고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다. 그는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다. 예수께서 하나님께 간절히 눈물과 심한 통곡으로 기도하셨다는 말씀이나,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심을 인해 들으심을 얻었다는 말씀은 참으로 신비하다.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연합된 것은 신비이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성경이 증거하는 바이다. [8-10절]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예수께서는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셨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난을 당하며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셨다(빌 2:8). 그가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다는 말씀은 특히 그의 인성(人性)에 해당되는 말씀이다. 그의 신성(神性)은 본래 완전하셨다. 그러나 그의 인성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완전함이 증거되셨다. 그의 순종과 의는 완전해졌고 그의 속죄사역은 다 이루어졌다. 예수께서는 완전한 대제사장과 완전한 구주와 완전한 중보자가 되셨다. 이렇게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며 온전케 되셨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믿음은 마음의 순종이다(롬 6:17-18). 비록 믿는 이들의 순종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마음으로 믿고 실제로 순종하고자 하는 자들은 구원받은 자들이다. 이런 자들을 위해 예수께서는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예수께서는 그를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구원, 곧 한번 받으면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을 구원을 주시는 것이다. [11절]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앞에서 읽은 바와 같이, 구약성경 시편 110:4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 즉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이라고 불렀다. 멜기세덱은 누구인가? 그는 아브라함 시대에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출하기 위해 싸우고 돌아올 때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라함을 맞으며 축복했던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창 14:18-19). 그때 전쟁터에서 돌아온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전쟁 노획물의 십분의 일을 드렸다(창 14:20). 살렘 왕 멜기세덱은 신비한 인물이며 그의 이름에는 깊은 예표적인 뜻이 있었다. 성도가 영적으로 성장하면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점점 더 경건해지고 의로운 인격이 되며 그와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의 지식이 많아지고 말씀의 깨달음이 깊어진다. 그러나 서신의 수신자들은 아직 그렇지 못했다. [12절] [이는]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되었음이라]. 본 서신을 받는 수신자들은 믿은 지 오래 되었으므로 마땅히 영적으로 성장하여 다른 이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선생들이 되어야 했었다. 신자는 믿은 지 여러 해가 되면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사람은 복음 진리를 듣고 거듭나 믿고 회개함으로 새 생활이 시작되고, 성경말씀으로 양육되어 그의 지식이 자라고 견고해지고 점점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사람이 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새 신자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권면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영적으로 어린 상태에 있었다. 그들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들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었다. 그들은 우유나 마시고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할 자들이었다. 교회 안에는 두 부류의 교인들이 있다. 하나는 영적인 어린아이들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으로 성장한 자들이다. 전자는 엄마의 젖이나 우유만 먹는 어린아이들과 같고, 후자는 단단한 음식도 먹을 수 있는 성장한 자들과 같다. 전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들 즉 성경의 기본적 진리들만 받을 수 있는 정도의 교인들이고, 후자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 즉 성경의 모든 교리와 모든 생활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교인들이다. 세례 대상자들을 위한 학습반 공부의 내용들은 전자를 위한 것이지만, 신구약성경의 자세한 강해나 기독교 교리의 체계적 지식과 윤리적 문제들이나 여러 이단적 신학 사조들에 대한 강론은 후자를 위한 것이다. [13-14절]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義)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계속 실천함으로 인해 지각이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본 서신을 받는 자들은 의(義)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영적 어린아이와 같았다. ‘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을 가리킨다. 성경말씀의 내용과 목적은 의(義)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면 그것이 의이다. 성경의 목표는 의이다. 그것은, 의가 없었던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은혜의 복음과 또 이렇게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이 실제로 의롭게 살아야 할 교훈들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실제로 의롭게 사는 것이다. 의의 말씀을 경험한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또 실제로 의롭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수신자들은 하나님의 의의 말씀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부족했다. 영적 성장은 단지 이론적 지식으로 되지 않고 실천을 통해 우리의 지각과 감각이 연단되어 선악을 분별하게 됨으로 이루어진다. 영적 성장은 성도가 실제로 하나님의 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또 선악을 분별하는 지각과 감각이 자람으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히브리서 5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주 예수께서는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이시다. 구약시대의 제사장은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너는 영원히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우리를 위한 영원하신 제사장으로 세우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영원한 제사장이 되셨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연약을 아시는 대제사장이시다.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은 사람의 연약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의 연약을 아시고 동정하실 수 있는 대제사장이 되셨다. 그는 많은 고난을, 특히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신비를 다 알지 못하지만, 그는 우리의 연약을 경험하신 우리의 좋은 대제사장이시며 좋은 구주이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케 되셨고 그를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심과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대속을 이루셨다. 그는 우리의 죄사함의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그는 우리의 놀라운 구주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자. 우리는 세상 끝날까지 그를 믿고 순종하자. 넷째로, 우리는 다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진리들만 이해하고 어려운 말씀들을 감당치 못하는 영적인 어린아이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아직 남을 가르치거나 돌볼 힘이 없고 진리를 위해 싸울 힘도 없다. 그러나 교회에는 영적으로 성장한 자들도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의 말씀을 감당하는 자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에 굳게 서서 의를 실천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말씀의 실천을 통해 지각이 연단되어 선과 악을 분별하는 힘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교회 안에 믿음이 약한 자들을 가르치고 권면하고 붙들어 줄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진리들에 머물지 말고 성경의 어려운 말씀도 읽고 연구하며 배워야 한다. 또 모든 의의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교회 안에 처음 믿는 자들을 가르치고 권면하고 붙들어주는 자들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듣고 배우고 실천함으로 다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6장: 확실한 소망을 가지자 [1-2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성도가 믿은 지 오래되면 영적으로 성장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을 넘어서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한다. 본문은 기독교 신앙의 초보적 내용으로 몇 가지를 말한다. 첫째는, 죽은 행실을 회개함이다. 죽은 행실이란 죄로 죽은 행실을 가리킨다. 그것은 불경건, 우상숭배, 돈 사랑, 불의, 미움, 음란, 거짓, 탐욕 등이다. 죄를 회개함은 신앙생활의 첫걸음이며 기본이다. 둘째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다. 회개한 자는 하나님께로 나아간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그를 두려워하고 섬기는 것은 경건의 기본적 요소이다. 회개와 믿음은 신앙생활의 첫걸음이다(행 20:21). 셋째는, 세례들이다. ‘세례들’은 죄씻음들을 의미한다. 우리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을 받았다. 물세례는 그것을 표시하고 확증한다. 또 성도는 실수가 있을 때마다 예수님의 보혈의 샘에 나아가 씻음을 받는다. 그 씻음은 반복적이다. 넷째는, 안수이다. 세례식의 안수는 죄씻음을 상징하고, 임직식의 안수는 회중으로부터 그 직분의 구별을 나타내고, 병자에게 안수함은 하나님의 치료하시는 은혜의 손길을 구하는 뜻이 있다. 다섯째는, 죽은 자의 부활이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날 모든 사람이 부활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셨다(요 5:29). 우리는,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다. 여섯째는, 영원한 심판이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하다. 천국이 영원하듯이, 지옥도 영원하다(막 9:43). 우리는 이런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에만 머물거나 그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가야 한다. ‘완전한 데’라는 말은 영적 성숙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단한 음식을 먹는 것과 같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의의 말씀을 경험하며 선악을 분별하는 영적 성숙을 말한다. [3절]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구원적 신앙의 시작이나 그 신앙의 성장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의 믿음의 시작자요 완성자이시다(히 12:2).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이 세상에서 그의 허락하심 없이 되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의 구원과 믿음도, 믿음의 성장도 그러하다.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자라나게 하신다(고전 3:6-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는 신앙의 성숙함에 나아갈 것이다. [4-6절] [이는]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없음이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본문은 우리가 초보적 진리에 머물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할 이유를 보인다. ‘한번 비췸을 얻었다’는 말씀은 복음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이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었다’는 것은 성령의 은사들을 체험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는 것은 복음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선한 내용들, 즉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내세에 있을 부활과 천국의 기쁜 일들과 심판과 지옥의 두려운 일들에 대해 믿게 된 것을 뜻하는 것 같다. ‘타락한 자들’이란 기본적 신앙에서 떨어져 배반한 자들 즉 배교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혹은 공공연하게 욕을 보였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성도가 타락하여 배교자가 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우리는 믿는다. 왜냐하면 성경은 성도가 끝까지 견디어 영광에 이른다는 것 즉 소위 ‘성도의 견인(堅忍)’을 밝히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요 10:28; 빌 1:6), 하나님의 선택의 불변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역과 중보 사역의 완전함, 성령의 인치심의 진리들은 그것을 더욱 확실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하시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 자들은 잠시 연약할 수 있으나 마침내 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구원받은 성도가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말로 이해하지 말고 가상적인 경고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자들은 넘어질까 조심하면서 겸손과 두려움으로 깨어 있는 생활을 해야 한다. 만일 어떤 이가 타락하여 믿음을 배반했다면 그는 참으로 중생한 자가 아닐 것이다. [7-8절] [이는]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의 단비, 은혜의 단비를 받아 성장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께 복을 받지만, 영적으로 성장하기는커녕 가시와 엉겅퀴 같은 나쁜 열매를 맺으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를 받고 마침내 지옥 불에 던지울 것이다. 사람은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타락과 배교의 위험한 경계선에 서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 성장은 선택과목이 아니고, 필수과목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라면, 우리는 반드시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9-10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이는]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사랑의 수고로](전통사본)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하심이니라]. 히브리서 저자는 배교에 대해 경고했지만 그 편지 수신자들이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한다. ‘구원에 가까운 것’이라는 원어( 에코메나 소테리아스 )는 ‘구원에 수반하는 것들’이라는 뜻이다 (KJV, NASB, NIV) . 그것은 그들에게 구원에 수반하는 행위의 열매들이 있다는 뜻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들의 영적 미성숙을 책망하며 배교를 경고했지만, 실상 그들 속에 좋은 것들과 선한 행위의 열매들이 있음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불의하지 않으셔서 그들의 행위와 그들이 성도들을 섬긴 것을 잊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행위’라는 말은 그들의 선한 행위를 가리킨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의 수고로 성도들을 섬겼고 또 섬기고 있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성도들을 섬기는 행위로 표현되었다. 사람들은 우리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고 또 알아도 곧 잊어버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롭고 선한 행위들을 다 기억하신다. [11-12절] [그러나]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저자의 간절한 소원은, 첫째로, 이 서신을 받는 수신자들이 다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는 것이다. ‘너희 각 사람이’라는 말은 이 권면의 말씀이 교회의 일부 사람들에게가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되기를 원함을 나타낸다. ‘동일한 부지런’이라는 말은 열심 있는 성도들과 비교하여 그들의 부지런과 동일한 부지런이라는 뜻이다. 모든 성도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둘째로, 성도들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는 것이다. ‘소망의 풍성함’이라는 원어는 ‘소망의 충만한 확신’이라는 뜻이다. 성도들의 소망은 예수님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다. 셋째로, 우리는 앞서간 믿음의 사람들을 본받는 자가 되는 것이다. 앞서간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살았고 마침내 약속들의 성취를 받았다. 그들이 받은 약속들이란 죽은 후에 그들의 영혼들이 들어간 천국과 거기에서의 안식이다. [13-15절] [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받았음이니라]. 본문은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하나님의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은 자의 예로 아브라함을 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말씀을 처음 주신 것은 하란에서이었다고 보인다. 그때 그의 나이는 75세이었다(창 12:4). 아브라함이 오래 참았다는 것은 이 75세부터 그가 이삭을 아들로 받았던 100세까지 약 25년 간의 세월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긴 시간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25년 간의 세월을 의심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고 기대했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오래 참은 아브라함에게 복의 약속을 주셨다. 그것은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는 내용이었고, 이것은 메시아로 말미암은 구원의 복의 약속이었다. [16-18절]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어떤 것의 참됨을 엄숙히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모든 논쟁에서 진실을 호소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맹세하며 말씀하심으로 그 약속을 보증하셨다(창 22:16-18).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수 없는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은 첫째로 그의 약속하심 자체이며, 둘째로 그의 맹세하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확실한 약속을 주시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얻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19-20절]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성도의 소망은 튼튼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과 같다. ‘휘장’이라는 말( 카타페타스마 )은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을 가리킨다(히 9:3). 휘장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이 죄로 인해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교제의 회복을 의미한다.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께서 하늘 지성소로 들어가셨으므로, 우리의 소망은 더욱 견고하다.

히브리서 6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들을 넘어서서 완전한 데로 나아가자.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들은 회개, 믿음, 세례, 죽은 자들의 부활, 심판 등이다. ‘완전한 데’라는 말은 성경의 모든 말씀을 알고 믿고 실천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 둘째로, 우리는 배교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배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떠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신앙 사상의 변질이며 계명에 대한 불순종이다. 우리는 이런 불신앙과 불순종에 떨어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동일한 부지런을 가지고 확실한 소망에 이르자.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께서 친히 맹세로 주신 확실한 내용이다. 그것은 튼튼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과 같다. 우리는 그 소망을 확실하게 붙들자. 7장: 더 좋은 소망 [1-2절]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평화, 평안]의 왕이요. 멜기세덱은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인물이다. 그는 살렘 왕으로서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가서 싸워 이기고 돌아올 때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라함을 축복하였고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 아브라함은 그에게 전쟁 노획물의 십분의 일을 주었다.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豫表)한 신비한 인물이었다. ‘멜기세덱’이라는 히브리어는 ‘의(義)의 왕’이라는 뜻이다. 또 살렘 왕이라는 말은 ‘평안의 왕’이라는 뜻이다.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아께서는 공의로 다스리실 평안의 왕이실 것을 예언하였다(사 9:6-7). [3절]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같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멜기세덱은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는 자이었다. 하나님께서 멜기세덱을 신비한 베일에 감추신 것은 그를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로 삼기 위하심이었던 것 같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과 비슷한 자로서 역사상 잠시 언급된 후 언급이 없다. 그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메시아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었다. [4-7절]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폐일언하고[변론할 것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높은 점은 두 가지다. 첫째로, 그는 아브라함에게서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받았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아론의 자손들은 제사장의 직분을 받았고 율법의 규정에 따라 자기 형제들에게 십일조를 받았지만, 레위 족보에 들지도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았다. 둘째로, 그는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는다. [8-10절]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레위 지파 제사장들은 죽을 자들로서 십분의 일을 받았지만, 멜기세덱은 영원히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는 자로서 십분의 일을 받았다. 이 점에서도 멜기세덱은 레위 지파 제사장들보다 뛰어났다. 레위는 아직 그 조상 아브라함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고 말할 수 있다. [11절]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구약시대의 제사장 직분은 부족하였다. 구약시대의 제사장 직분이 부족함이 없었다면 아론의 반차[반열, 모습]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반열, 모습]를 좇는 다른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 직분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온전함을 얻을 수 없었다. 여기에서 말한 온전함은 ‘완전한 사죄와 완전한 의, 완전한 화목과 완전한 교제의 회복’을 가리킨다.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은 자신들이 흠과 점이 많았고 종종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부패되었고 육신적으로도 죽을 자들이었다. 또 그들의 제물들도 죄인들에게 참으로 사죄(赦罪)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실상 장차 오실 메시아의 속죄사역의 상징과 예표(豫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멜기세덱의 모습을 좇은 제사장이시다. 그로 말미암아 구약시대의 율법 제도는 폐지되고 복음의 새 시대가 시작된다. 율법은 그의 대속 사역에 대한 상징과 예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시대의 율법을, 즉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셨다(마 5:17). 그의 십자가의 대속 사역으로 죄인들에게 완전한 사죄와 완전한 의, 완전한 화목과 완전한 교제의 회복이 이루어졌다(롬 3:21-22; 10:4). [12-13절] [이는]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변역할 것임이니] [이는]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것임이니라]. 제사장 직분의 변화는 율법 제도의 변화를 보인다. 율법에 의하면, 제단 일은 레위 지파 제사장들 즉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 맡겨진 일이고 다른 지파 사람들은 그 일에 관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전혀 다른 족속에 속한 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시편 110편에서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을 메시아로 보내실 것을 예언하셨다. 여기에 신약시대의 새 제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암시되어 있었다. [14-15절] [이는]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분명함이라].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 구약시대의 제사장 제도와 율법 제도를 영원하게 하는 것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메시아가 유다 지파에서 나게 하지 않으시고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나게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께서 유다 지파에서 나셨고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으로 오신 것을 보면, 구약시대의 제사장 제도와 율법 제도가 폐지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 [16-17절]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은 아론의 자손이어야 한다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아 구주가 되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구주가 되셨다. ‘무궁한 생명’이란 이 세상의 삶에 제한된 육신의 생명이 아닌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시대의 제사장들과 달리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시다. 그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다. [18-19절] [이는]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페하였음이라.] ([이는]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못함이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보내신 이유는 구약시대의 제사장 제도가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여지기 때문이었다.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하였다. 사람은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롬 3:20). 율법은 사람의 죄 문제를 참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사람에게 구원을 주지 못한다. 구약시대의 제사장 제도나 율법 제도는 그 자체로는 연약하고 무익했다. 그것은 앞으로 오실 완전하신 메시아에 대한 예표이었다. 그러므로 메시아께서 오셨으므로 율법 제도는 폐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더 좋은 소망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義)가 되셨기 때문이다. [20-21절] 또 예수께서 제사장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맹세하심으로써 제사장이 되셨다는 점에서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보다 더 나으시다. 율법 제도 아래서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맹세하심으로 메시아를 제사장으로 세우셨다(시 110:4). [22절]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이와 같이’라는 원어( 카타 토수톤 )는 ‘이렇게 큰 것에 의해’[이만큼]라는 뜻이다. 여기에 ‘큰 것’이란 하나님의 맹세를 가리킨다. 즉 예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맹세에 의해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 ‘더 좋은 언약’이란, 구약이 예표적 성격의 언약이었으나 신약은 실체적 성격의 언약임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새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위해 새 언약을 세우셨다. [23-24절] 저희 제사장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살아계신다는 점에서도 구약의 제사장들보다 더 나으시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죽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수효가 많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변하지 않고 영원하다. ‘갈리지 않는다’는 원어( 아파라바토스 )는 ‘임시적이지 않다, 변하지 않다, 영속적이다’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은 영원하시다. [25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자기를 힘입어’라는 말( 디 아우투 )은 ‘그를 통하여’라는 뜻이고, ‘온전히’라는 말( 에이스 토 판텔레스 )은 ‘끝까지, 영원히 (Vg, Syr, NASB) , 완전히 (Thayer, NIV) ’라는 뜻이다. ‘간구한다’는 원어( 엔튕카노 )는 ‘중재한다, 중보의 일을 한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끝까지, 영원히, 완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것은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해 간구하시고 중보의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26-27절]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시고 악이 없으시고 더러움이 없으시고 죄인들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분이시다. 그는 자신을 위하여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으셨고, 단번에 자신을 드려 우리를 위한 속죄사역을 이루셨고 의(義)를 이루셨다. ‘단번에’라는 말( 에파팍스 )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이 완전하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제사가 필요 없음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단번에 이루신 의(義)는 완전한 의이다. [28절] [이는]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세우셨음이라]. ‘온전케 되었다’는 말은 속죄사역을 온전히 이루셨다는 뜻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구주와 완전한 중보자가 되셨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루신 속죄사역은 완전하고 영원하였다.

히브리서 7장의 진리와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이시다. 구약시대 아브라함 때에 나타났던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었다. 멜기세덱이라는 말은 ‘의(義)의 왕’이라는 뜻이며 그는 살렘 왕인데, 평안의 왕이라는 뜻이다. 그것들은 다 메시아의 명칭이다. 멜기세덱은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으며 시작한 날이나 죽은 날도 없었다. 메시아께서는 그의 신성(神性)에 있어서 아버지나 어머니가 없으시며 족보도 없으시며 시작한 날이나 죽은 날도 없으시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시며 지금도 살아계셔서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 또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았고 아브라함을 축복했다. 그것은 그가 아브라함의 후손인 레위 지파의 아론의 자손들인 대제사장들보다 더 높음을 보인다. 이런 모든 점들에서, 그는 메시아의 예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멜기세덱 같은 인물이시다. 그는 의의 왕이시며 평안의 왕이시며 시작도 끝도 없으신 신적 존재이시다. 그는 구약시대의 제사장들보다, 또 율법 제도보다 더 높으시다. 우리는 그를 믿고 사랑하고 섬긴다. 둘째로, 구약의 율법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되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 직분과 율법 제도가 사람에게 도덕적 완전함 즉 의(義)를 주지 못했다. 그것은 단지 장차 오실 메시아께서 이루실 의에 대한 예표이었다. 성경이 구약시대의 제사장과 다른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에 대해 예언한 것은 메시아의 오심으로 구약의 제사장 제도가 변경될 것을 보이며 그것은 또한 구약의 율법 제도의 폐지를 암시한 것이었다. 멜기세덱과 같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제 구약의 제사장 직분과 율법 제도가 폐지되었다.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알아야 하고 구약의 율법 제도의 폐지를 이해해야 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더 좋은 소망,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신 영원하신 대제사장이시다. 그는 거룩하시고 악이 없으시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단번에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 그는 실제로 속죄사역을 성취하셨고 우리의 죄를 사하셨고 우리에게 영원한 의가 되셨고 거룩함이 되셨다.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우리에게 더 좋은 소망이 되셨고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 또 그는 항상 살아계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고 중보의 사역을 하신다. 그는 그를 믿는 자들을 영원히,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며 그의 사역을 감사해야 한다. 8장: 더 나은 직분 [1-3절]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 레이투르고스 )[장막에서 섬기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할 것임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계시다는 것이다. 그는 영원히 살아계시고 자신을 단번에 드려 죄인들을 대속(代贖)하셨을 뿐 아니라, 하늘에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고 주께서 친히 만드신 하늘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자가 되셨다. 그는 땅 위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고, 지금도 하늘 성소에서 택자들을 위해 중보사역을 하고 계신다. [4-6절] [이는]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것임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디아포로테라스 )[더 나은, 더 뛰어난]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장막의 봉사자가 되신 까닭은 땅에서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레위 자손 제사장들이 땅에서 섬겼던 성막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시내산 위에서 그에게 보이셨던 본을 따라 성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셨다. 예수께서는 이제 바로 그 하늘 성막에서 섬기는 자가 되신 것이다. 그는 이제 더 나은 직분을 얻으셨다. 그것은 구약시대의 율법 아래서의 레위 자손 제사장들의 사역과 비교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그들의 사역과 비교하여 ‘더 나은’ 정도는 그가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 즉 새 언약의 중보라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7-9절]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새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되어 나올 때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그들과 맺으셨던 옛 언약과 비교된다. 이 두 언약은 다 하나님의 은혜언약 안에 속한다. 그러나 첫 번째 언약은 흠이 없는 완전한 언약이 아니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하나님께서 두 번째 언약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새 언약에 대해 예언하신 것을 보면(렘 31:31-34) 첫 번째 언약은 흠이 있는 것임이 드러난다. 이 예언된 새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세우신 언약이다. [10-12절]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새 언약의 특징은 네 가지이다. 첫째는 내면성이다. 옛 언약은 두 돌판에 새겨져 있고 후에 율법책에 기록되어진 것이었지만, 새 언약은 하나님의 법을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에 기록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의 할례, 마음의 변화, 즉 중생(重生, 거듭남)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것은 참된 회개와 믿음으로 나타난다. 새 언약은 죄인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언약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족속에서 택하신 자들과 맺으신 언약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자녀 됨이다. 옛 언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자녀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 새 언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진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셋째는 하나님의 지식의 충만함이다. 옛 언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지식이 있었다. 또 그들은 자녀들에게 어릴 때부터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사람이 그를 경외하고 그를 사랑해야 하는 것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했다(신 6:4-7). 그러나 이사야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때가 올 것을 예언하였다(사 11:9).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세상의 모든 족속,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었다. 오늘날 신약교회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들을 충만하게 소유하고 있다. 넷째는 완전하고 영원한 죄사함이다. 옛 언약에서 죄사함은 부분적이고 일시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날마다 반복적으로 속죄의 제사들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우리의 대속(代贖)을 완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믿는 우리는 영원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13절]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새 언약이라는 말은 옛 언약이 일시적이고 때가 되면 폐지될 것을 암시한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주실 필요가 없었고 또 주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이제 그가 새 언약을 말씀하셨으므로 그것은 옛 언약이 낡아지고 쇠하여지고 없어지는 것을 나타낸다. 구약시대에 예언되었고 예표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옛 언약은 폐지되고 이제 그것이 새 언약으로 대치될 수밖에 없다.

본장은 몇 가지 진리를 증거한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 아래서의 제사장들보다 더 나은 제사장 사역을 하신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단번에 드려 대속(代贖)을 이루셨고 지금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고 영원히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사역을 하고 계신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더 좋은 언약의 중보가 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새 언약의 중보를 의미한다. 예언된 새 언약의 특징은 네 가지인데, 첫째는 내면성, 즉 중생(重生, 거듭남)으로 말미암은 마음의 변화이며, 둘째는 하나님의 자녀 됨이며, 셋째는 어린아이들에게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지식의 충만함이며, 넷째는 완전하고 영원한 죄사함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옛 언약보다 더 나은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대속 사역을 이루셨고 지금도 하늘에서 그 중보의 사역을 계속하시는 것이다. 셋째, 옛 언약은 일시적이며 폐지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이제 옛 언약이 폐지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대제사장, 더 나은 언약, 즉 새 언약의 중보자를 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해야 하고,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영원한 대속(代贖)을 굳게 믿고 담대히 그러나 겸손하고 충성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9장: 영원한 단번 속죄 [1-5절]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구약시대의 성막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 부분은 성소(聖所, 하기아 a{gia )라고 불린다. 성소 안에는 예수님의 세상에 빛 되심과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사역을 상징하는 등대가 있었고, 또 예수님의 생명의 떡 되심을 상징하는 떡상과 그 위에 여섯 개씩 두 줄로 쌓아놓은 떡(진설병 陳設餠)이 있었다. 둘째 부분은 지성소(至聖所, 하기아 하기온 )라고 불린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중보 사역을 상징하는 금향로 8) 와 십계명 돌판이 들어 있는 언약궤가 있었다. 속죄소를 덮는 ‘그룹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한다. 특히, 속죄소는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통해 이루실 속죄사역을 상징한다. 그것은 율법으로는 정죄된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 것을 상징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에 근거한 구원을 증거한다. [6-7절]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제사장들은 보통 성소에 들어가 섬기는 일들을 하였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유대의 달력으로 7월 10일 속죄일에 1년 1차씩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 날 대제사장은 아마 3번 지성소에 들어갔던 것 같다(레 16:12-15). 그는 향로를 가지고 들어가 지성소에 연기가 가득하게 했고, 또 자신을 위한 속죄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 뿌렸고, 또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위한 속죄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 뿌렸다.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의 사역을 상징하였다. [8-10절]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 하기온 )[지성소](KJV, NIV)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에이스 톤 카이론 톤 에네스테코타 )[현재의 때를 위한](원문, KJV, NASB, NIV)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구약 제도 아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길, 즉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나타나 있지 않았다. 구약 제도는 비유적, 예표적이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때를 위한 것이었다. 구약의 제물들은 그 섬기는 자들로 그 양심상 온전케 할 수 없었다(7:11, 19). 사실, 짐승의 피는 사람의 죄를 깨끗케 할 수 없다. 그것은 개혁할 때까지 주신 것이었고 그 개혁의 때가 신약시대이다. 예언된 메시아께서 오심으로 구약의 예표는 성취되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 죄사함의 구원을 얻는다(히 7:27). [11-12절]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장래 좋은 일’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실 일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는 영원한 속죄사역을 이루시고 하늘 성소 곧 천국에 들어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이 일을 이루셨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그는 그의 피로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의 값을 지불하셨다. 그의 속죄의 핏값은 너무 크고 완전하기 때문에 ‘영원한 속죄’라고 불린다. 또 그것은 영원하기 때문에 매년 반복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고 표현되었다. 그의 죽으심은 한번으로 충족했고 더 이상 반복되실 필요가 없다. [13-14절]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구약시대에는 염소와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뿌려서 사람들의 몸의 부정을 깨끗케 하고 거룩케 하였다. 그렇다면,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흠 없는 자신을 드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얼마나 더 효력이 있겠는가? ‘영원하신 성령’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가리켰다고 본다. 무죄하신 신적 구주 예수님의 죽으심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속량할 수 있었다. 그 피는 효력이 있다. 그 피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죽은 행실들로부터 우리의 양심을 깨끗케 하며 우리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담대히 섬기게 만든다. 구약 성도들도 하나님의 정하신 제도를 통해 죄사함과 새 생활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은 더 크고 확실하다. [15절] [그리고]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또한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 영원한 기업 곧 천국의 약속을 얻게 한다. 영원한 나라, 영생의 나라인 천국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목표이다. 구원받은 우리는 천국 백성이 되었다. [16-17절] [이는]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없음이니라]. ‘유언’이라는 원어 ( 디아데케 )는 앞절의 ‘언약’이라는 말과 같다. 하나님의 언약은 유언적 성격이 있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기업 상속을 유언했다면, 아버지가 죽은 후 그 유언이 효력이 있듯이, 하나님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효력을 가지게 된다. [18-21절]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책에 기록하고 피를 취하여 그 책에 뿌리고 또 모든 백성에게 뿌렸고 그 책은 ‘언약서’라고 불리었고 그 피는 ‘언약의 피’라고 불리었다(7, 8절).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로 오셔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셨다. 주께서 친히 증거하신 바대로, 그 피는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는 바 . . . [새] 언약의 피”이었다(마 26:28). [22절]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피는 생명을 가리키며 피흘림은 죄사함의 의미가 있다(레 17:11).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는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 필요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받으셨고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 보혈을 흘리셨다. [23절]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성막 제도는 하늘의 원형에 대한 모형에 불과했고 짐승의 피뿌림도 장차 이루어질 완전한 제사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인 성막 기구들은 짐승의 피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지만, 하늘에 있는 성막 자체는 더 좋은 제물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피로 드려져야 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실제로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고 자신의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다. [24절] [이는]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나타나심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 위에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으로 완전한 속죄사역을 이루시고 그 속죄의 피를 가지고 천국 곧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들어가셨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지금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타나신다. 그것은 그의 계속적 중보 사역을 의미한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의 부족과 실수에 대해, 예수께서는 그가 흘리신 속죄의 피 공로를 끊임없이 적용하시는 것이다. 그는 지금도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중보 사역을 계속하신다(롬 8:34). [25-26절]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드리지 아니하셨나니] 그리하면[왜냐하면 만일 그러하였다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예수께서 역사의 마지막 시대에 오셔서 자기 피로 단번에 완전한 속죄 제사를 드리셨다. 그 피는 완전한 속죄의 피이다. [27-28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죽으셨고 두 번째 나타나실 것이다. 재림의 주님은 죄와 상관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단번에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히브리서 9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구약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때까지의 예표이었다. 구약의 성막 제도와 제사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하였다. 특히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씩 지성소에 들어가는 규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사역을 예표하였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 예표의 실체로 오셔서 친히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고 단번에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의 사역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수없이 반복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 친히 자기 몸을 드려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그의 속죄의 죽음은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중보 사역을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의 효력은 크고 영속적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자들, 그가 자신에게 주셔서 십자가 위에서 대속하신 자들, 성령께서 인치셔서 중생시키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이 연약할 때마다 아버지께 중보 사역을 하시며 그들을 성화의 길로 인도하신다.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 그가 우리를 구원하신 목표는 영광의 천국에서 영생하는 것이다. 그는 의인들의 구원과 악인들의 심판을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는 오직 믿음과 순종으로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10장: 담대히 서로 격려함 1-18절,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사역 [1-4절]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죄에 대한 의식, 죄책에 대한 의식]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율법 제도는 장차 오는 좋은 일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대한 그림자 즉 예표이었고 참 형상 곧 실체가 아니었다.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그러므로 율법 제도는 부족했다. 율법 제도는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온전케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해마다, 절기 때마다 제사를 반복해 드렸다. 만일 제사가 사람을 온전케 하였다면 그것은 해마다 반복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사는 해마다 죄를 생각나게 할 뿐이었다. 황소와 염소의 피는 사람들의 죄를 없이 할 수 없었다. 여기에 구약시대의 율법 제도, 즉 구약 제도의 부족이 있었다. 즉 상징적인 짐승의 피는 사람들의 죄들을 없이 하거나 사람들을 온전케 하지 못하였다. [5-7절] 그러므로 [그가]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성경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제사를 원하지 않으심과 메시아를 통해 한 뜻을 이루실 것을 예언하였다. 본문은 구약의 시편 40:6-8의 헬라어 70인역을 인용한 것이다. 헬라어 70인역 본문은 히브리어 본문과 조금 다르다. 헬라어는 로마 시대에 공용어였다. 헬라어 70인역 구약성경은 사도시대에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성경이었던 것 같다. 신약성경에는 이 헬라어역 구약성경이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인용된 시편 본문의 내용은 메시아께서 짐승의 번제물과 속죄제물로가 아니고 자신의 몸을 드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과 이것이 두루마리 책 곧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고(요 5:39), 또 부활하신 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해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눅 24:27). 구약성경은 메시아의 오심과 그의 사역에 대해 예언하였다. [8-9절]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번제와 속죄제는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께서는 오셔서 그 첫 것을 폐하시고 둘째 것 곧 자신의 몸을 드려 이루실 사역을 이루실 것이다. 다시 말해, 율법 제도, 제사 제도의 폐지와 그 대신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속죄사역의 완성이 예언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던 것이다. [10절]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구약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셨고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려 우리의 속죄를 이루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속죄사역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얻었다. 여기에 ‘거룩함을 얻었다’는 원어( 헤기아스메노이 )는 완료시제로서 우리의 거룩함이 시작되거나 진행 중인 것이 아니고 완료된 것임을 말한다. 같은 표현이 고린도전서 1:2에도 나온다. 거기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라고 말하였는데, 원문에는 역시 완료시제이므로 ‘거룩하여졌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 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을 얻었다. 이것이 법적인 거룩과 의, 즉 법적인 구원인 것이다. [11-13절]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우데포테 oujdevpote)[결코]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이 드렸던 제사들은 범죄자들의 죄를 결코 없애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 곧 속죄제사를 드리셨다. 그의 죽음은 영원한 속죄제사의 행위였다. 그의 피흘리심은 우리의 죄를 영원히 속(贖)하는 행위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세상에는 죄를 위한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치 않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속죄사역을 이루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고 그의 원수들인 사탄과 악령들과 그 종들이 다 굴복하게 되기까지 거기서 기다리시다가 그때가 되면 심판자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다. [14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온전케 하셨다’는 원어( 테텔레오켄 )도 완료시제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케 하심과 의롭다 하심이 완전하였음을 증거한다. 물론, 이것은 법적 개념이다. 실제적으로는 아직 우리 속에 불결과 죄성이 있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거룩과 의를 얻은 자들이 되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말하였다(롬 10:4). [15-18절]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신약시대의 성도들의 삶은 구약의 율법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성령의 법으로 산다. 성령의 법은 종의 법이 아니고 자유의 법이다. 성도는 자원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킨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와 불법을 기억지도 않으신다. 죄를 위해 다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은 완전하다. 이 구원 안에서 우리는 기쁨과 자유를 누리고 천국의 영광을 확신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율법 제도로는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없었다. 짐승의 제물들이 사람들의 죄들을 없이하지는 못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단번에 속죄사역을 이루셨다. 주 예수께서는 인류의 참 구주로 오셨다. 그는 인류를 위해 참으로 좋은 일을 하셨고 율법이 예표한 참 형상이셨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리셨고 그를 믿는 자들은 법적으로 거룩함을 얻었고 영원히 온전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해 계속 중보 사역을 하신다. 셋째로, 그러므로 다시 죄를 위해 제사를 드릴 것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은 완전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 그래서 주 안에 거하는 자들은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 그러므로 천주교회의 미사는 이 복된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예수님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단지 순종생활에 힘써야 한다. 19-39절, 믿음의 담력과 인내가 필요함 [19-20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 톤 하기온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 그의 피는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피’이다(히 9:12). 죄인은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으나 그의 피로 죄씻음을 받은 자마다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성도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예수께서 성소 휘장을 찢듯이 자신의 육체를 찢어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다. 그 길은 구약 제도 아래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새 길이며 생명력이 넘친 길이다. 누구든지 이 길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구원을 받고 영생을 누릴 수 있다. [21-22절]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악한 양심이 깨끗케 되고](NASB, NIV)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의 교회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한 크신 제사장이시다. 우리는 그의 피로 악하고 더러웠던 양심이 깨끗해지고 우리의 몸을 맑은 물로 씻은 바 되었다. 이것이 죄사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온전한 믿음으로’라는 원어( 엔 플레로포리아 피스테오스 )는 ‘믿음의 충만한 확신으로’라는 뜻이다. 우리는 충만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23절]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신실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 텐 호몰로기안 테스 엘피도스 )[소망의 고백]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우리는 소망의 고백도 굳게 잡아야 한다. 우리의 소망의 주요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의인들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다. 우리가 이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야 할 이유는 약속하신 이가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들을 다 이루실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것들이 더 가치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별로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다. [24절]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우리는 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다. 바울은 디도서 2:14에서 “[주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했다. 이 의무를 위해 우리는 서로 돌아보며 서로 격려해야 한다. 여기에 성도들 간의 교제의 필요성이 있다. 우리는 서로 교제하며 권면해야 한다. [25절]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이런 믿음, 소망, 사랑의 실천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쓰자고 덧붙여 교훈한다. 사람에게는 게으른 성질이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모이기를 폐하고 그것이 습관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을 본받지 말고 서로 권면하여 주의 재림의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써야 한다. 모이는 것은 여러 면에서 유익하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는 시간이다. 그것은 또 성경말씀의 교훈을 받아 힘을 얻고 자라가는 기회이다. 또 그것은 서로 교제하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좋은 기회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주 모여야 한다. [26-27절] [이는]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헤쿠시오스 )[고의적으로]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있을 것임이라].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라는 말은 ‘구원받은 후’라는 뜻이다. ‘죄를 범한즉’이라는 원어( 하마르타논톤 , 현재분사)는 ‘계속적 행위’를 가리킨다. 즉 ‘만일 우리가 진리의 지식을 받은 후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버리고 그와 정반대로 행하여 고의적으로 계속 범죄한다면’이라는 뜻이다. 이런 자에게는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을 것이다.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는 까닭은 그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심판의 선언은 구원받은 자들도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경고이며, 구원받은 성도들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반드시 소유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믿다가 타락한 사람은 가룟 유다처럼 외형적으로 믿음의 세계에 들어와 있지만 사실상 중생하지 못한 자라고 본다.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종종 경고의 말씀을 준다(마 7:21; 롬 8:13; 11:22; 히 6:4-8). [28-29절]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시대에 비추어 그의 경고의 말씀을 강화시킨다. 그는 인간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의 벌도 엄중하였다면, 하나님의 아들께서 실제로 오셔서 주신 복음 진리를 저버린 죄의 벌이 얼마나 더 크고 엄중하겠는가라고 말한다. [30-31절] [이는]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앎이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겠다고 친히 말씀하셨다. 복음 진리를 저버린 배교자들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시대에 심히 강포했던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셨고(창 8-10장) 심히 음란했던 소돔 고모라 성을 유황불비로 심판하셨고(창 19장) 또 모세를 거역했던 고라와 그 동료들을 산 채로 땅 속에 묻으셨다(민 16장). 우리는 심판자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32-34절]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이는] 너희가 갇힌 자[나의 갇힘들] 9) 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하늘에 있는] 10)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빛을 받은 후’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라는 뜻이다(고후 4:6).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예수님 믿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경험하였고 그 싸움에서 잘 참았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일 때문에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환난을 당했고 구경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의 더 낫고 영구한 기업 즉 천국을 확신하였고 그 소망이 견고했기 때문에 옥에 갇힌 주의 종들을 동정했고 자기들의 재산과 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꺼이 당하였다. [35-36절]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확신](KJV, NASB, NIV)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이는]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이는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해 인내가 필요함이니라]. 우리는 믿음의 담대함과 확신을 가져야 하고 그것을 버리지 말고 끝까지 붙잡아야 한다. ‘큰 상’은 믿음의 결과인 영생과 천국의 영광을 가리킨다. 또 성도의 믿음의 길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믿음은 인내를 통해 온전케 된다. 참으로 믿는 자는 끝까지 참을 것이다. [37-39절] [이는]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생략) 11)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하셨음이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멸망]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잠시 잠깐 후’라는 표현은 주님의 마음을 표현한다. 요한계시록 22장에서 주께서는 3번이나 ‘내가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고 세 번째는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다(22:7, 12, 20). 이것이 주님의 마음이며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인내함으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한다. 불신앙은 멸망을 가져올 뿐이다. 그러나 믿음은 구원을 가져온다(막 16:15-16; 요 3:36).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 즉 믿음의 충만한 확신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소망의 내용들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야 한다. 그것은 주 예수님의 재림과 의인들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다. 셋째로, 우리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한다. 우리 각인은 사랑과 선행을 힘쓸 뿐 아니라, 그 일을 서로 격려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주 예수님의 재림의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 그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증진에 유익하다. 다섯째로, 우리는 고의적으로 계속 범죄하는 배교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중생한 자는 배교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경고는 필요하다. 사실, 거듭난 자만 이 경고를 듣고 순종할 것이다. 여섯째로, 우리는 믿음의 담력과 인내를 끝까지 가져야 한다. 11장: 믿음의 선조들 본장은 ‘믿음의 장’으로 인류 역사 초기로부터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믿음의 선조들의 예를 들어 우리의 믿음을 격려한다. 12)

1-7절, 믿음의 선조들 아벨, 에녹, 노아 [1-2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이는]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얻었음이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바라는 것들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믿는다. 그것들은 장차 이루어질 것이지만 믿음을 통해 현재 우리 속에 있고 장차 우리의 믿음대로 실제로 이루어질 것이다. 믿음은 또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 우리는 아직 보지 못하는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근거하여 믿는다. 우리는 우리 눈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나 믿는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들을 보지 못하나 그것들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그것들은 장차 사실로 증거될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가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선진들이 믿음으로써 증거를 얻었기 때문이다. 믿음의 ‘선진들’은 본장에 언급된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라합 등의 인물들을 가리킨다. [3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은 사람들 중에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조차도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후 맨 마지막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창조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한다. 하나님께서 천지와 그 가운데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알려주신 진리이었을 것이며 그것은 그의 후손들에게 전달되어 내려왔을 것이다. 모세는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권을 쓰면서 첫 번째 책을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의 근본이 되는 진리이며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할 첫 번째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혹은 이르시되)’라는 말이 11번 나온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상 행하신 많은 일들과 말씀들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을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을 통해 믿게 되었다. 천지만물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물질세계가 영원하지 않고 그 세계는 영원자존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영이시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들은 나타난 것들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하신 영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보이는 것들을 창조하셨다. 우리는 보이는 물질세계 배후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가 있으며 그 세계가 실상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그런 비슷한 사실이 점점 더 드러나고 있다. 사람의 생각이 사람의 몸을 지배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원리나 힘이 기계들을 움직인다. 우리는 물질이 전부라거나 물질이 영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영의 존재와 가치를 인식해야 하고 또 창조주와 섭리자이시며 눈에 보이지 않으나 전지전능하신 영이신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4절]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본문은 믿음으로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고 말한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담의 첫째 아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둘째 아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아벨의 제물이 가인의 제물보다 나은 점이 무엇일까? 아벨의 제물이 가인의 제물보다 나은 점은 정성과 피의 제물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가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린 것은 그의 정성을 증거한다. 또 그가 그 양을 죽여 피를 흘린 것은 그의 속죄 신앙을 보인다. 짐승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언제 어떻게 아벨에게 전해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벨은 아마 하나님께서 짐승을 죽이고 그 가죽옷으로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주신 사건을 듣고 짐승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내어보내시기 전에 그들을 위해 한 짐승을 죽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그가 짐승을 죽이신 사건은 아담과 하와가 처음으로 죽음을 본 사건이었다. 그는 가죽옷을 통해 장차 메시아의 대속의 죽음으로 그들의 죄가 가리어질 것을 암시하셨다. 아벨은 이 사건을 통해 짐승 제사를 이해했을 것이다. 짐승 제사는 장차 오실 메시아의 대속의 죽음을 암시하였다. 죄인들은 자신들의 선한 행위들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으나 메시아의 죽음을 통해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속죄 신앙이며 아벨에게 있었던 믿음은 바로 이런 믿음이었다고 본다. 아벨은 지금도 이 믿음을 증거한다. [5-6절]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할 것임이니라].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서 데려가시므로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옮기웠다. 에녹의 옮기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의 예표이며 천국이 참으로 있다는 생생한 증거이었다. 본문은 에녹이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고 말한다.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하늘로 옮기워진 것을 보면 확실히 그 속에 믿음이 있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계심을 믿고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에녹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었고 또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은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다. 에녹은 보이지 않는 천국을 믿었고 그 믿음대로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 옮기워졌다. [7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義)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노아는 보지 못하는 일들에 대해 경고를 받았을 때 그것을 믿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장차 홍수를 땅에 일으켜 세상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다 죽일 것이며 노아가 방주를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가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를 들었을 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 말씀을 믿었고 방주를 예비하였다. 이것은 노아의 평소의 믿음의 결과이었을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방주를 준비하여 마침내 그의 모든 가족들을 다 구원하였다. 이와 같이, 노아는 보지 못하는 일들 즉 장차 임할 홍수 심판과 그때 얻을 구원을 믿었다. 노아의 믿음은 심판과 구원에 대한 믿음이었다. 노아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였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준비하고 구원을 받았으나,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방주 짓는 일을 비웃다가 마침내 홍수로 멸망을 당하였다. 노아의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였다. 방주는 그에게 있어서 믿음으로 얻은 의와 같았다. 이로써 노아는 믿음을 좇는 의(義)의 후사가 되었고 모든 성도들은 그의 믿음을 본받는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와 죽은 자들의 부활을 성경에 근거하여 믿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을 믿자. 이것은 신자의 기본적인 믿음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의 책인 성경을 통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얻게 되는 믿음이다. 셋째로, 우리는 아벨처럼 최선의 정성과 속죄의 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자. 아벨은 하나님께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다. 그것은 정성과 속죄의 제사이었다고 본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최선의 정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믿음으로 그를 섬겨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에녹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의 상급인 천국을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자. 에녹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었고 300년간 그와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죽지 않고 천국에 들어갔다. 다섯째로, 우리는 노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자. 노아는 장차 있을 홍수 심판 경고와 방주 건립에 대한 말씀을 믿고 인내하며 순종했다. 우리도 마지막 불 심판의 경고를 믿고 인내하며 순종하자. 8-22절, 믿음의 족장들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한 민족의 조상을 삼으려 하셨을 때 그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었다(창 12:1).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순종하며 나갔다.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도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물을 버려두고,’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즉시 그를 따랐다(마 4:18-22). 천국을 향한 우리의 걸음도 비슷하다. 우리는 천국까지의 과정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한다. [9-10절]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이는 하나님께서 설계자요(BDAG) 건축자인, 기초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우거(寓居)하였다. 그의 거처는 이동하기 쉬운 장막이었다. 그의 아들 이삭과 그의 손자 야곱도 같은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았고 함께 장막들에 거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도 영구적인 집을 건축하지 않았다. 본문은 그 이유가 그들이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건축하실 성을 바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장차 한 성을 만들어주실 것을 내다보았다. 지혜롭고 실력 있는 설계자이시며 뛰어난 건축자이신 하나님께서 지으실 도시는 이상적 도시일 것이다. 구원받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 같은 생활, 장막 생활을 하고 있다. 천국은 아직 미래의 일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때때로 이리저리 이사하다가 마침내 몸의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우리는 장차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11절]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전통사본에는 생략됨)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얻었으며 나이가 지났으나 출산하였으니](전통사본) 13)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믿음으로 사라는 나이가 지났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고 출산하였다. 내년 이맘 때, 그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라는 처음에 믿지 않았던 것 같다(창 18:12). 그러나 사라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는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지 않는 신실하신 분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그대로 믿었다. [12절]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 14) 은 아브라함을 가리킨다. 사라도 늙고 아브라함도 늙었다. 그러나 몇 백 년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게 하겠다”는 약속을 다 이루셨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었고 또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메시아께서 오셨고 그 메시아를 통해 세상의 모든 택자들이 구원을 얻고 있다. 아브라함은 셀 수 없이 많은 성도들의 조상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그의 말씀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13-14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약속들]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이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가리킨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고향을 떠나는 순종을 했고 믿음으로 약속의 땅에서 우거하며 장막에 거했고 사라도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었고 출산하였다. 그들은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 안에서 죽었다. 그들은 그 자손들이 하늘의 별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번성하겠고 그들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얻겠고 그 자손을 통해 천하만민이 복을 얻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그 약속된 내용들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약속들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들은 그 약속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였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약 700년 후에 그들에게 실제로 주어질 것이다. 그들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천하 만민이 복 즉 구원의 복을 얻게 되는 것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약 2천년이 지난 후에 이루어질 일이었다. 또 천국은 그보다 훨씬 더 먼 훗날의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믿고 소망했다. 또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들을 ‘외국인과 나그네’로 증거하며 고백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 것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 세상은 나그넷길이며 우리의 참 고향은 영원한 천국이다. [15-16절]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들이 찾았던 본향은 그들이 나왔던 이 세상의 고향 갈대아 우르가 아니었다. 만일 그 고향이었다면, 그들은 그곳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은 본향’ 15) 을 사모하였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본향,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한 성’ 즉 천국이다. 그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히 10:34)이며,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 즉 ‘하나님께서 설계자이시며 건축자이신, 기초가 있는 성’(히 11:10)이며, ‘장차 올 영구한 도성’(히 13:14)이다. 그들이 이와 같이 하나님을 믿고 그의 약속을 신뢰하였고 이 세상의 것들을 바라지 않고 장차 올 것을 바랐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고 그들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하셨다. 그 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서 제자들을 위해 예비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처소이며(요 14:2) 요한계시록 21장에 예언되어 있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다. 사도 요한은 환상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성을 보았는데 그것은 마치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 같은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성이었다(계 21:2, 11). 거기에서는 눈물이나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을 것이다(계 21:4). [17-19절]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시험하시는 명령을 받은 때에도 한번 더 드러났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대로 이삭을 아들로 주신 후 어느 날 그에게 그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다. 아브라함은 그 시험에서 믿음의 순종을 하였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그 마음은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는 행위로 나타났다. 그 순종은 그의 사랑하는 외아들에 대한 사랑보다 더 강하였다. 그의 외아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아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늘의 별 같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었고(창 13:16; 15:5), 또 이삭을 주신 후에 ‘이삭에게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라고 말씀하셨었다(창 21:12). 그런 이삭을 하나님께서는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순종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도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그의 확신을 보인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부활 신앙도 포함했다. 그 사건에서 이삭은 죽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삭 대신 한 숫양을 번제로 드리게 준비하셨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받은 것과 같았다. 이것은 죽은 이삭이 다시 산 자가 된 것과 같았다. [20-21절]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헬라어 70인역 본문)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이삭은 믿음으로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라”고 말했고(창 27:29) 에서에게 “네 아우를 섬길 것”이라고 말했다. 야곱도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할 때 오른손을 둘째 아들 에브라임의 머리에 두고 왼손을 첫째 아들 므낫세의 머리에 두었는데, 그것은 그의 믿음의 행위이었다. [22절]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요셉도 믿음으로 임종시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을 증거하며 그때 자기 해골도 그곳으로 옮겨줄 것을 부탁하였다(창 50:24-25). 히브리서 11:8-22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아브라함처럼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실 때 그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순종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가는 길은 미지의 길이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믿고 그가 명하시는 그 미지의 세계를 향해 가야만 한다. 둘째로, 우리는 천국을 사모하자. 믿음의 족장들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건축하실 성을 사모하였다. 그들은 이 세상 사는 동안 외국인과 나그네와 같이 자신을 생각했고 하늘에 예비된 참된 본향, 즉 천국을 사모하였다. 하나님의 구원 섭리의 마지막 목적지, 우리의 최종적 목적지는 천국이다. 주께서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2-3). 요한계시록 21:1-2,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우리는 그 천국을 사모하자. 셋째로, 우리는 사라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자. 사라는 나이가 많아 임신하고 출산하는 일이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고 아들을 잉태하는 힘을 얻었고 그 아들을 출산하였다. 이삭도 에서와 야곱에게 장래 일로 축복하였고,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에게 예언적 축복을 하였고, 요셉은 출애굽을 예언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을 포함하며, 그것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시는 능력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은 어려운 일들이 많지만,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들을 굳게 믿자. 넷째로,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부활 신앙을 가지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약속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한 것은 그가 죽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그의 부활 신앙을 증거한다. 우리는 죽은 성도의 복된 부활과 영생을 확신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자. 23-40절, 세상을 초월한 믿음의 사람들 [23절]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낳았을 때 그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남자아이가 나거든 강에 던지라’(출 1:22)는 애굽 왕 바로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그 아이를 석 달 동안 숨겼다. 비록 석 달 동안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 아이를 죽이지 않은 것은 그들의 믿음이었고 그것은 귀한 믿음이었다. 그들이 석 달 후에 그를 포기한 것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되어진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최선을 받으셨고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를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교육시키고 훈련시키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 가운데 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었고 그 모친이 그의 유모로 그를 기를 수 있게 되었으므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인도자가 될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애굽의 궁중 교육을 받았다. 그것은 구약성경의 처음 5권을 기록하는 데 충분한 언어적, 지식적 훈련을 포함하였다. [24-26절]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선택하였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상당한 권력과 부귀와 영광을 수반했으나,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였을 때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고 불림을 거절하였다. 그것은 그가 누릴 수 있는 모든 세상적 권세와 부귀와 영광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모세는 어린 시절부터 모친을 통해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인 것을 들었을 것이다. 그는 이제 커서 이 세상의 즐거움이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이라고 깨달았다. 그는 그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선택하였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고난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이라는 표현은 구약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메시아 약속을 알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모세도 그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너를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었다(창 12:3; 22:18). 그것은 메시아 약속이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통해 온 세상은 구원의 복을 얻을 것이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누렸던 애굽의 모든 보화들은 다 이 세상에 속한 것뿐이었다. 그것들은 대체로 죄악된 것들이었다. 그러나 메시아의 사역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귀한 것이었다. 이 세상의 영광은 사망과 멸망을 가져오지만, 메시아의 사역은 영원한 생명과 평안을 줄 것이다. [27절]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무서워 아니하였으니 이는]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참았음이며]. 모세는 믿음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애굽을 떠났다. 그것은 430년 동안 살아 이미 고향같이 친숙해진 애굽을 버리고 어떤 일이 있을지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난 것이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것이었다. 그것은 오늘날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천국을 소망하며 새 삶을 시작하는 것과 같다. 모세는 애굽을 떠날 때 애굽 왕 바로의 분노와 위협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는 그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고 순종하였다. 그의 담력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왔다. 믿음은 담력과 평안을 가져온다. 그러나 불신앙은 불안과 두려움을 가져올 뿐이다. [28절]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규례]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모세는 유월절과 피뿌림의 규례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선포하고 지켰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어린양의 피를 이스라엘 백성의 집의 문설주(문의 양 기둥)와 문인방(문의 위아래를 가로지르는 나무; 상인방과 하인방)에 바르게 했는데, 이는 장자를 멸하는 심판의 천사로 이스라엘 집을 치지 않게 하려 한 것이었다. ‘유월’(逾越, pass over)은 심판의 천사가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넘어간다는 뜻이다. [29절]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일은 모세의 믿음을 증거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을 증거한다. 본문은 “믿음으로 저희가”라고 말한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얼마 안 가서 큰 위기를 만났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놓였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있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믿음으로 손을 들어 홍해를 가리켰고 백성은 믿음으로 홍해 속으로 담대히 나아갔다. 홍해는 육지같이 갈라졌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의 말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갈대 늪을 지나간 것이 아니고, 출애굽기 본문이 증거하는 대로 바닷물이 양쪽에 벽이 되어(출 14:22) 이스라엘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같이 통과한 기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 큰 위기에서 구원하신 기적이었다. 그러나 바로와 애굽 군대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뒤쫓아서 바다 속으로 들어왔다가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를 통과해 저편 육지로 올라오자마자 바다가 원래대로 회복됨으로 다 물에 잠겨 죽고 말았다. 이것은 그 강퍅한 애굽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셨던 추가적 징벌이었다. [30절] 믿음으로 [저희가]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정복해야 할 첫 번째 성이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6일 동안 매일 여리고 성을 한바퀴씩 돌았고 제7일에는 성을 일곱 바퀴을 돌았다. 그것은 놀라운 믿음의 순종이었다.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 백성이 무너뜨릴 수 없었던 성이었으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었다. 그들은 그 성으로 들어갔고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그 성안에 있는 남녀노소와 우양과 나귀를 다 칼날로 멸하였다. [31절] 믿음으로 기생( 포르네 )[창녀]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여리고 성의 멸망 중에 라합의 가정은 예외적으로 구원을 얻었다. 라합은 여리고 성의 창녀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죄악된 일을 직업으로 삼았던 여인이었다. 그는 분명히 큰 죄인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큰 죄인 라합 속에 믿음의 은혜를 주셨다. 그 여인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믿게 되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홍해를 육지같이 건넌 일 등 여러 가지 일들을 듣고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일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신 것과 그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이 여리고 성을 정탐하기 위해 들어와 자기 집에 머물렀을 때 자신의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지붕 위에 벌여놓은 삼대 속에 숨겨주었다. 그런 후에 그는 그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아비 집을 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의 판단은 옳았고 그의 간청은 지혜로웠다. 라합과 그의 형제들은 여리고 성의 멸망 중에서 구원을 얻었다. 여리고 성 사람들에게는 라합같이 회개하고 믿을 기회가 충분히 있었으나 그들은 회개치 않고 믿지 않았고 다 멸망을 당했으나, 라합은 순종치 아니한 동족들과 함께 멸망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고 은혜로 얻은 믿음 때문이었다. [32-34절]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사람들의 많은 예들 중에 단지 몇 사람의 이름들을 추가했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등은 다른 나라들과의 전쟁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였었다. 사무엘이나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한 자들이었다. 또 다윗은 사무엘에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지 약 10년 후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유다 왕이 되었다. 다니엘은 믿음을 지키다가 사자굴에 던지웠으나 하나님께서 사자들의 입을 막아주심으로 구원을 얻었고, 다니엘의 세 친구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믿음의 절개를 지키다가 불무불에 던지웠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불의 세력으로부터 지켜주셨다. 다윗과 엘리야는 사울과 이세벨의 칼날을 피하였고, 삼손이나 히스기야는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었었다. 기드온, 바락, 입다, 다윗, 그리고 요나단 등은 믿음으로 이방인들의 군대의 진을 물리쳤었다. [35-38절]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혼 우크 엔 악시오스 호 코스모스 )[세상은 그들에게 가치가 있지 아니하였도다](KJV, NASB, NIV))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엘리야 때에 사르밧 과부는 자기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체험하였으며 엘리사 때에 수넴 여인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믿음은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고 더 좋은 부활을 소망한 자들의 믿음이었다. 므낫세 때 무죄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그 중에는 그런 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더 좋은 부활’이란 죽은 자가 살아나는 현세의 부활과 비교할 때 그것보다 더 좋은, 더 나은 내세의 영광스런 부활을 가리킨다. 유다의 아사 왕은 말년에 범죄하여 자기에게 바른 말을 전해주는 선견자 하나니를 옥에 가두었다. 이스라엘 왕 아합 때에 참 선지자 미가야는 동료 선지자에게 뺨을 맞고 옥에 갇힘을 당했다. 또 선지자 예레미야도 매를 맞았고 차꼬에 채움을 받았으며 토굴 옥 음침한 방에 감금되었고 물 없는 진흙 구덩이에도 던지웠다. 하나님의 영의 감동으로 바른 말을 했던 스가랴는 성전 뜰 안에서 돌에 맞아 죽임을 당했다. 또 전해오는 말 16) 에 의하면 선지자 이사야는 톱으로 켬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 제사장 아히멜렉과 동료들 85명은 칼에 죽임을 당하였다. 또 어떤 이들은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고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을 크게 여기지 않았다. 세상은 그들에게 가치가 있지 않았다. 그들은 세상을 초월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난과 핍박을 감당할 수 있었다. [39-40절]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런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진실히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한 자들이며 하나님의 친 백성이요 구원을 받은 자들이요 영생을 소유한 자들이라는 증거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지는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그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예비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다. 예수께서는 택자들의 구원을 다 이루셨다(요 19:30). 택자들의 구원은 역사적으로, 객관적으로 이루어졌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러나 그 구원은 아직 우리에게 소망 중에 주어졌다(롬 8:24). 이 구원은 장차 영광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롬 8:29-30. 지나간 세대들은 소망 중에 그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마지막 세대들은 그 영광의 구원을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모세와 같이 세상의 부귀 영광과 쾌락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하자. 이 세상의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며 장차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불에 다 불타 없어지고 말 것이다. 우리는 우리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자. 둘째로, 우리는 애굽 왕 바로의 진노와 위협, 홍해와 여리고 성 같은 세상의 난관들을 믿음으로 극복해내자. 이스라엘 백성에게 문제는 그런 난관 자체가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도우심을 믿고 나아가자. 우리가 믿음으로만 산다면 어려운 문제는 곧 해결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세상을 초월하는 믿음을 가지자. 건강이나 물질적 복이나 세상적 출세와 성공도 복이지만, 우리는 그것들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된 몸의 부활, 영광스런 천국과 영생을 믿고 사모하며 고난과 핍박과 심지어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12장: 거룩함을 이룰 것 1-13절, 믿음의 경주와 징계 [1절]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잘 해야 한다. 17) 우리에게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 그들은 믿음의 선진들을 가리킨다.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일은 때때로 고난 중에 외로워 보이지만 결코 외로운 길이 아니다. 달리기 경주자가 가벼운 복장을 하고 달리기에 임하듯이, 믿음의 경주자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 ‘모든 무거운 것’이란 온갖 종류의 세상 염려들을 가리킨다. 그것들은 의식주에 대한 염려, 돈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아내와 자녀들 등 가정에 대한 염려를 포함한다. 얽매이기 쉬운 죄들은 형제에 대한 미움과 시기, 음란, 거짓과 탐욕 등의 죄악들을 포함한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벗어버려야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잘 할 수 있다. 또 신앙의 경주에는 인내도 필요하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성도의 경건생활도 하나의 훈련과정이며 거기에도 인내가 필요하다. 히브리서 10:36은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하다가 어려운 문제를 직면할 때 피곤해지거나 낙심하여 포기하지 말고 인내하며 그 경주를 끝까지 잘 마쳐야 한다. [2절] 믿음의 주( 아르케곤 )[시작자]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 텔레이오텐 )[완성자](KJV, NASB, NIV)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시작시키시고 완성시키시는 자이시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행하신 아름다운 일이며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가 시작하셨고 그가 온전케 하실 일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8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했고, 또 빌립보서 1:6에서는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기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모범을 보이셨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란 그가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게 되실 일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에게 비난을 들으셨고 침 뱉음과 매맞음을 당하셨고 벌거벗기어 십자가에 못박혀 수치와 고통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는 그런 고통을 끝까지 참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님을 바라보며 참고 달려야 한다. [3절] [이는]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함이니라]. 우리는 이 세상의 악한 자들 때문에 또 심지어 때로는 교회 안의 거짓 형제들의 위선과 부족 때문에 피곤해지고 낙심케 되기 쉽지만, 그때 예수님의 고난과 인내를 생각하며 낙심치 말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믿음의 경주에서 피곤해지거나 낙심치 않고 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4절]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예수께서는 위선적 유대 지도자들에게 미움과 정죄를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죽으셨다. 또 옛날부터 순교의 피를 흘린 신실한 종들이 없지 않았다. 우리가 그들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신앙의 경주와 고난은 아직 작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치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렘 12:5). [5절]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우리의 믿음의 경주에는 하나님의 징계하심도 있다. ‘징계하심’이라는 원어( 파이데이아 )는 징계를 포함해 사람에 대한 모든 교육과 훈련을 뜻한다(엡 6:4; 딤후 3:16). 성도는 하나님의 징계하심을 가볍게 여기지도, 낙심치도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며 그의 책망과 징계를 잘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매를 경히 여기고 무시하는 것은 악하고 패역한 마음이며(사 1:5)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에게는 더욱 엄한 징벌과 단련을 주실 것이다. [6-8절] [이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채찍질하심이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성도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낙심치 말아야 할 이유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들을 징계하시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미워하시는 자들에 대해서는 징계하지 않고 버려두시고 무관심하신다. 버려두심과 무관심은 징계보다 훨씬 더 불행한 일이다. 하나님의 징계와 징벌은 우리에 대한 그의 관심과 사랑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하나님의 징계하심은 그가 우리를 아들과 같이 대우하시는 표이며 증거이다.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교훈하고 책망하고 징계한다. 좋은 아버지일수록 자녀에 대해 충실히 징계한다. 그러나 자기 자녀가 아닌 자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 대해 징계하신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없다면, 우리는 사생자이며 참 아들이 아닐 것이다. [9-10절] 또( 에이타 )[더욱이]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태도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징계하시는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다. 자녀는 그를 징계하는 아버지를 공경해야 한다. 그러하다면 하물며 우리는 우리를 징계하시는 공의의 섭리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복종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자녀가 그를 징계하는 부모에게 복종해야 하듯이, 우리는 모든 ‘영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아야 한다. 더욱이,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육신의 부모는 그 자녀들의 유익을 위해 징계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뜻대로’ 즉 그들에게 선하게 생각되는 대로 징계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유익을 위해 즉 우리로 그의 의와 거룩하심에 참여시키기 위해 징계하신다. 즉 징계의 목적은 우리의 성화(聖化)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징계를 감사히 받아야 한다. [11-13절]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늘어진]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3:24). 그러나 교훈과 훈련과 징계를 통해 우리는 실제로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의로운 삶은 또한 ‘평안’의 삶이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지만, 의인에게는 평안이 있다. 이와 같이, 성도는 징계를 통해 의의 평강한 열매 즉 의롭고 평안한 삶을 누린다. 성도의 삶은 거룩과 의의 훈련 과정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면 심신으로 연약해져 손도 늘어지고 무릎도 연약해지고 다리도 절뚝인다. 영적으로도 그러하다. 그러나 성도는 징계가 구원받은 참 성도의 표요 자신의 성화에 유익한 것임을 깨닫고 힘을 잃지 말고 일어나 전진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잘 해야 한다. 우리는 외롭지 않고 우리에게는 구름같이 우리를 둘러싼 많은 증인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힘과 위로와 격려가 된다.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할 때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겨버려야 한다. 또 우리는 인내를 가지고 경주해야 한다. 또 우리는 믿음의 시작자와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친히 고난 중에 오래 참으신 그를 바라보아야 한다. 둘째로, 믿음의 경주에는 하나님의 징계도 있지만, 우리는 그 징계를 달게 받고 잘 참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 징계는 참 아들의 표이다. 하나님의 징계하심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당연히 있는 것이며 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징계하심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참 자녀 곧 중생한 성도가 아니고 사생자일 것이다. 징계는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즉 징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에 참여케 된다. 징계는 받는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잘 받고 나면 우리의 인격과 삶은 좀더 거룩해지고 의로워지고 성화를 이루고 온전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징계를 받을 때 낙심치 말고 잘 참아야 한다. 14-29절, 화목과 거룩함을 좇으라 [14절]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화목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모든 사람과 화목하고 또 거룩한 것이다. 주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요 13:34). 성도간에 원수를 맺는 일은 육신의 죄성에서 나오는 일이다(갈 5:20). 로마서 12:18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하라”고 말했다. 우리가 화목을 원해도 상대방이 우리를 오해하고 미워하고 악한 마음으로 우리를 해하려는 경우가 있겠지만,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 악한 마음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화목하기를 힘써야 한다. 물론 우리는 믿지 않는 자와 교제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고린도후서 6:14-16,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사랑은 악을 인정하거나 용납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전 13:5-6). 또 거룩함도 하나님의 뜻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그를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거룩하여졌다(고전 1:30; 히 10:10, 14). 그러나 이제 이 거룩은 실제적으로 우리의 인격과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지만, 거룩한 삶을 살다가 영생에 이를 것이다.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좇으라’는 말은 우리의 성화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애쓰고 노력해야 함을 나타낸다. 데살로니가전서 4:1,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우리는 화목과 거룩함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에서 ‘이것’(남성관계대명사)은 거룩함을 가리킨다. 거룩한 자만이 주님을 뵈올 것이다. 예수께서도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5:8). 그들은 언제 주님을 뵈올 것인가? 그들은 천국에서 그를 뵈올 것이다. 거룩하지 못한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님을 뵙지 못할 것이다. 에베소서 5: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15-17절]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베벨로스 )[불경건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우리는 다음 몇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란 믿음과 회개와 순종의 표가 없는 자를 가리킨다. 우리는 교회에 그런 자가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쓴 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쓴 뿌리는 불신앙, 불평, 원망을 가진 자를 가리킨 것 같다. 그런 자는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더럽힌다. 셋째로, 우리는 음행하는 자나 불경건한 자가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음행은 사람에게 있는 대표적 죄악이다. 불경건한 자는 하나님의 복을 가볍게 여기고 장자의 특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파는 자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천국과 영생을 세상 것과 바꾸려는 자가 그러하다. [18-21절] [이는]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黑雲)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아님이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우리가 모든 사람과의 화목함과 거룩함을 좇으며 서로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와 쓴 뿌리와 음행하는 자와 불경건한 자가 없도록 해야 할 이유는 우리가 시내산이 아니고 천국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불붙는 산과 캄캄한 구름과 어두움과 번개와 천둥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친 음성으로 율법을 받았다. 그들은 거기에서 짐승이라도 산에 오르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었고 모든 백성은 다 심히 두려워하며 떨었었다. [22-24절]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구약 백성과 달리, 우리는 시내산 대신 천국으로 나아간다. 시내산 율법은 죄인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드러내었다. 그러나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과 평안이 있는 곳이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너희가 이른 곳’이라는 말은 신약 성도들이 영적으로 이미 천국에 들어왔음을 보인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6에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말했고, 골로새서 1:13에서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말하였다. 본문은 천국에 대해 자세히 묘사한다. 첫째로, 천국은 ‘시온산’이라고 표현된다. 이것은 하늘에 있는 시온산을 의미한다(계 14:1). 둘째로, 천국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히브리서 11:10이 말한 ‘하나님께서 설계자이시요 건축자이신 성이다. 그것이 바로 천국이다. 셋째로, 천국은 ‘천만 천사’가 있는 곳이다. ‘천만’이라는 말( 뮈리아스 )은 ‘수많은’이라는 뜻이다. 천사들의 수는 셀 수 없이 많다. 넷째로, 천국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 이름들이 다 천국의 명부에 기록되어 있다. 다섯째로, 천국은 ‘만인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다. 그는 만민의 심판자이시며 거기서 자신의 영광을 특별하게 나타내신다. 여섯째로, 천국은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들’이 있는 곳이다. 예수님 믿어 죄사함의 구원을 얻고 죽은 성도들의 영혼들은 지금 다 천국에 들어가 있다. 그들은 죄성이 없는 온전케 된 영들이다. 일곱째로, 천국은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이 계시며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가 있는 곳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셨다. 아벨의 피는 단순히 무죄한 의인의 피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더 나은 피, 곧 택하신 자들의 죄를 대속(代贖)하신 피이다. [25-27절]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 랄룬타 )[계속 말씀하시는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그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신약 성도들은 구약 성도들보다 더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더욱 조심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내산에서 위엄 중에 말씀하셨고, 신약시대에는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날도 성경을 통해, 바른 목사들의 설교를 통해 계속 들려지고 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거절하지 말고 받아들이며 믿고 진지하게 순종해야 한다. 과거에 시내산에서 경고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자들에게도 엄한 벌이 내려졌는데, 하물며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친 음성을 무시하고 거절하고 배반하는 자들에게는 얼마나 더 엄한 벌이 내려지겠는가? 이전에 땅을 진동시키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제 땅뿐 아니라 하늘까지도 진동시키실 것이다. 이것은 진동치 아니할 나라를 영원히 있게 하시기 위해, 진동할 것들을 변화시키려 하심이다. 마지막 날 하늘과 땅이 다 불타 없어지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이다(벧후 3:10-13). 천국은 진동치 아니할 나라,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벧전 1:4) 나라이다. [28-29절]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감사하자](NASB, NIV, Thayer, BDAG).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진동치 않을 나라인 천국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소멸하는 불이시다. 그는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그의 뜻을 거스르고 그를 업신여기는 자들에 대해 심판의 불로 소멸하시는 두려운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쁨과 두려움으로 섬겨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화목과 거룩함을 좇아야 한다. 주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또 우리에게 잘못을 행한 자에 대해 일흔 번씩 일곱이라도 용서하라고 교훈하셨다. 우리는 정당한 이유 없이 다른 사람과 원수가 되지 말고 또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화목하고 혹시 마음에 상한 것이 있으면 속히 풀어야 한다. 또 우리는 모든 죄를 버리고 거룩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며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 천국은 죄가 없는 곳이며 죄 없는 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우리는 천국의 백성답게 이 세상에서도 사랑과 거룩을 실천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몇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란 믿음과 회개와 순종의 삶이 없는 자를 가리킨다. 둘째, 우리는 우리 교회에 쓴 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쓴 뿌리는 불신앙, 원망, 불평의 말을 하는 자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런 자는 교회를 어지럽히고 다른 사람들을 더럽힌다. 셋째, 우리는 우리 교회에 음행하는 자나 불경건한 자가 생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 또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의 신분과 영생과 천국 기업의 상속권을 세상의 헛된 것과 바꾸어서는 안 된다. 셋째로, 우리는 말씀하시는 자를 거역하지 말아야 한다.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자들도 징벌을 받았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믿지 않고 순종치 않고 거역하는 자들은 어떤 큰 징벌을 받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구원의 복을 감사하며 경외함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소멸하는 불과 같이 두려우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무시하거나 멸시해서는 안 되며, 특히 그가 주신 신구약 성경말씀을 헛되이 받지 말고 진지하게 읽고 듣고 받고 믿고 힘써 실천해야 한다. 13장: 사랑과 선행에 힘쓸 것 1-13절, 형제 사랑, 음행, 돈 사랑, 인도자 본받음 [1절] 형제 사랑하기( 필라델피아 )를 계속하고. 형제 사랑은 주께서 주신 새 계명의 내용이다(요 13:34). 주 안에서 형제된 우리들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의 성격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한다”(4-5절)고 잘 증거되어 있다. 이것은 거룩하고 고상한 사랑이다. 우리는 이런 사랑으로 주의 재림 때까지 또 우리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물론, 형제 사랑은 단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선한 행실로 해야 한다(요일 3:17-18). [2절]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형제 사랑은 손님 대접의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창세기 18장과 19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은 손님을 잘 대접했고 그러다가 천사들을 대접하였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손님을 대접할 때 겸손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또 정성껏 하였다. 돈은 선한 일을 위해 쓰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디모데전서 6:17-18은, 부자들에게 마음을 높이거나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교훈하였다. [3절]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형제 사랑은 옥에 갇힌 자나 학대받는 자를 돌아보는 일로도 나타나야 한다. 예수께서는 앙과 염소의 비유에서, 형제들 중에 작은 한 사람이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 방문하는 것이 곧 주님께 한 행위라고 말씀하셨다(마 25:35-40). [4절]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결혼은 모두에게 귀하며 잠자리는 더럽지 않으나](KJV). [그러나](전통본문) 18)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결혼과 부부관계는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주셨던 아름다운 일이며 결코 더러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며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남편이든 아내이든 간음하거나 음행하는 것은 죄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성 관계에 대해 매우 조심하며 처신해야 한다. [5-6절]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우리는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아야 한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근원이 된다(딤전 6:10). 하나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도우시고 공급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보배로 삼는 자는 이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양보할 수 있다. [7절]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교인들을 인도하는 자들은 목사들과 장로들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성경을 통해 또 성경적 설교 즉 성경의 바른 해석을 통해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목사들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전달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2:13에 보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도 바울에게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고 사도 바울은 그들의 태도가 합당하였다고 증거하였다. 물론, 목사와 장로들이 말과 행실에 있어서 먼저 성도들에게 본이 되어야 하지만(벧전 5:2-4), 성도들은 그들의 바른 교훈과 지도를 잘 따라야 한다. 교인들은 그들의 인도자들의 삶의 마지막을 주의해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한다. 좋은 모범을 보인 목사들은 바른 설교와 삶을 보여주었을 것이고 그들의 마지막도 좋을 것이다. 물론 사이비한 이단 사상들을 전하고 돈과 명예와 육신의 쾌락를 사랑하는 자들은 그 끝이 좋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통해서도 경고를 받아야 하지만, 특히 진실한 목사들과 장로들, 모범적인 인도자들의 생애를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참 인도자이시다. 마태복음 23:8-10,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하나이니 곧 그리스도시요](전통본문) 19) 너희는 다 형제니라. . . .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참 인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2천년이 지난 지금도, 또 세상 종말까지, 영원한 천국에서도 동일하시다. 우리는 그를 본받아야 한다. [9절] 여러 가지( 포이킬로스 )[다양한] 다른( 크세노스 )[이상한]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이란 세상 사람들의 기호에 맞추어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부패시키고 변질시키는 사이비한 목사들의 교훈들을 가리킨다. 그것들의 근원은 사탄과 악령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불변하심은 그에 관한 교리의 불변성을 보인다. 기독교 진리는 가감할 수 없이 명확한 내용을 가지고 있고 시대마다 변할 수 없다. 오늘날 기독교계는 매우 혼란스럽다.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이 교회들 안팎에 많이 있다. 이단적인 자유주의 신학, 비성경적 교회연합운동, 성경 계시를 넘어서는 이단적인 은사주의, 종교다원주의, 열린예배, CCM 등의 풍조가 교회 안에 가득하다. 그러나 참된 성도들은 오늘날 유행하는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에 이끌리지 말고 바른 교훈, 즉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에 굳게 서야 한다. 우리는 그 옛길, 그 건전한 길을 붙들어야 한다. 그것이 보수신앙이 추구하는 바이다. 성경 진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소식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이며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진리이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음식을 먹는 것은 우리의 육신에 관계되는 것뿐이지 우리의 영혼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는 단지 음식을 먹는 교제가 아니고 성경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 안에서 서로 교제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라고 강건케 되는 것이 필요하다. [10-13절]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대제사장이 죄를 위해 그 피를 성소에 가지고 들어간 짐승의 고기는](KJV, NASB) 영문(진영 陣營)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 오네이디스모스 )[비난, 불명예, 모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율법에 규정된 대로, 속죄제물 중에 그 피를 제사장이 성소에 가지고 들어가지 않은 경우는 그 고기를 제사장이 회막 뜰에서 먹을 것이지만, 성소에 들어간 경우는 그 고기를 먹지 못하고 그것 전체를 진 바깥 재 버리는 곳에서 불살라야 했다(레 4:5-11; 6:26, 30).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하나님의 모든 택한 백성들을 위한 속죄제사이었다. 대제사장이신 그는 그의 피를 가지고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으므로 그의 육체는 진 밖에서 불살라지셔야 했고 그래서 예루살렘의 성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것이다. ‘그 능욕’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비난과 불명예와 모욕을 가리킨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비난과 불명예와 모욕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그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야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제국의 핍박을 피해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에서 생활해야 했었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 오실 때까지 또 우리의 목숨이 끝날 때까지 거룩하고 진실한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또 우리는 타지에서 온 형제를 영접하고 감옥에 갇힌 형제나 학대받는 형제를 돌아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결혼과 부부관계를 귀하게 여기며 결혼의 순결성을 지켜야 한다. 성도는 부부의 의무를 다해야 하고 정조를 지켜야 한다. 우리는 결코 간음하거나 음행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심판받을 죄이다. 셋째로, 우리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가진 것을 족한 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부하려 하는 자들이 시험과 멸망에 빠지며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고 믿음에서 떠나게 된다고 말했다(딤전 6:9-10). 넷째로, 우리는 경건하고 진실한 인도자들을 본받아야 한다.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은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하며 신앙생활의 본을 보여야 하며 교인들은 그들을 주목하고 그 믿음과 행위를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에 끌리지 말고 옛길, 바른 길을 붙들고 주를 위해 고난과 죽음까지 각오하며 그를 따르는 자들이 되자. 14-25절, 찬송과 선행, 복종과 기도, 축원 [14-15절] [이는]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찾음이니]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우리의 현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는 고난의 생활일지라도, 장차 영광의 천국에 들어갈 것이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죄사함은 우리의 찬송과 기쁨의 이유이다.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다. 찬송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창조하신 목적이며(사 43:21) 또 우리를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신 목적이다. 또 찬송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이다. [16절]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또 우리는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고 힘써야 한다. 이런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성경의 요지는 첫째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는 것과, 둘째로 서로 사랑하고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선행은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열매이다. ‘서로 나눠주기’라는 원어( 코이노니아 )는 ‘교제, 구제, 구제 헌금’이라는 뜻이다. 선행과 구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힘써야 할 내용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들이다. [17절]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이는]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함이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회중의 인도자들, 즉 목사들과 장로들은 교인들의 영혼들을 위하여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결산할 자들처럼 깨어 있다. 이렇게 사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다. 그러므로 교인들은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 그럴 때 인도자들은 교인들을 위해 즐거움으로 일하게 되며 근심으로 하게 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이 교인들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교인들은 목사들과 장로들이 무거운 마음으로 봉사의 일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18-19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확신함이니]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 사도 바울이라고 생각되는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자주 기도의 요청을 하였다. 에베소서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데살로니가전서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1,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히브리서 저자가 성도들에게 기도를 요청한 이유는 두 가지이었다. 첫째로, 그는 그와 그의 일행이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선한 일을 위해 힘쓰고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행하는 선한 일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둘째로, 그는 더 속히 그들에게 돌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히브리서 수신자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가 지금 이곳에 있다. 설교자는 교인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며, 교인들은 설교자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20절]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강[평안]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히브리서 저자의 기원은 예수님에 관해 세 가지를 증거한다. 첫째로, 예수님은 양의 큰 목자이시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부르셨었다.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목자장’이라고 불렀다(벧전 5:4). 우리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교회의 크시고 참되신 목자이시며, 인간 목사들은 교회의 작은 목자들에 불과하다. 둘째로, 예수님은 영원한 언약의 피를 흘리셨다. 이것은 히브리서의 대주제이기도 하다.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구약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의 그림자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신 새 언약은 수정될 수 없는 영원한 언약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로 구원을 얻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역사적 사실이다. 그가 죽고마셨다면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크게 손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7:31은,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고 말했다. 본문은 또 하나님을 ‘평안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세상에서 평안은 죄로 인하여 상실되었었다(사 57:21; 롬 3:17). 그러나 주 예수의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죄사함 받은 심령들 속에 평안이 임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 평안의 하나님이시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선행과 순종을 온전케 하시기를 소원하는 기도 내용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도들의 선행과 순종의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선행과 순종은 단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주시는 힘으로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기도의 이유가 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일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일에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다 행하게 하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21절에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 말씀이라고 본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영광을 증거한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5:12의 말씀과 같다: “[천사들이]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22-25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너희를 인도하는 [모든]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서신을 받는 자들에게 그의 권면을 용납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겸손한 태도이다. 그는 본 서신을 ‘간단히 쓴’ 서신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보기에 이 서신은 길지만, 이것을 ‘간단히 쓴’ 서신이라고 표현한 것은 저자가 그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권면하고자 한 내용은 이것보다 훨씬 더 많았음을 보인다. 우리는 성경책을 읽을 때 ‘너무 긴 내용,’ ‘너무 많은 내용’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많은 내용들을 ‘간추린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읽어야 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디모데를 ‘우리 형제 디모데’라고 표현한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3:2에서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표현했다. 그 저자는 디모데와 매우 친근한 사이임에 틀림없다. 또 본절은 디모데가 옥에 갇혔다가 놓인 것을 증거한다. 그 저자는 디모데가 속히 오면 그와 함께 그들에게 가서 만나보겠다고 말한다. 서신 수신자들은 두 부류로 표현된다. 첫째는 ‘인도하는 모든 자들’ 즉 목사들과 장로들이며 둘째는 ‘모든 성도’이다. 하나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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